2008년 12월 31일 수요일

세계에서 가장 황당한 나라 Top3


1. 시랜드 공국

인구: 15명
언어:영어
정부수반:공왕
면적: 549제곱미터

 세계2차대전때 영국군이 독일군의 공습을 막기위해 동부해변을 따라설치한 콘크리트 구조물로써, 전쟁이 끝나자 전(前)영국군 소령이였던 로이베이츠는 이 곳을 차지해 자신의 영토라 주장했다. 물론 영국정부는 재판을 열었으나, 전쟁이 끝난 뒤 각국의 영해가 육지로부터 3해리(약5.6Km)이내로 정해져 자연스래 영국영토밖으로 나간덕에 재판은 로이베이츠가 승리하고 말았다. 이 곳은 시랜드공국이라 불리며 아무런 규제를 받지않고 살수있다. 9천엔, 그러니까 9만원정도로 백작의 지위까지 받을 수 있다하며, 지금은 반값으로 값을 내려 4만5천원으로 백작지위를 살 수 있다한다. 2006년 6월에 있던 대화제로 전 영토가 타(전 영토라 해도 수영장크기) 전 국민이 해외로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었다고 한다. 
  시랜드공국에 입국할시에는 엄중한 정차가 필요하며, 들어갈시에 passport에 찍는 입국허가도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건설기념으로 만든 엽서와 시랜드공국만의 화폐까지있다한다
아래 사진은 시랜드공국영토 사진입니다.


2. 아틀란티움 제국

인구 : 2명
영토 : 18평 (18평 아파트)
언어 : 영어
정부수반 : 황제, 법무장관
군사력 : 병력 2명. (고무보트 1척)

호주 시드니 18평 아파트에 위치한 아틀란티움 제국은 황제 조지 2세가 건국하였다.
헌법도 제정되어 있으며, 사촌동생이 법무장관이며 인터넷 홈페이지는 황제께서 친히 운영하신다.
아틀란티움 제국 홈페이지 http://atlantium.org


3. 모로니아 왕국


언어: 왕이 직접 만든 언어와, 영어

정부수반: 왕

호주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 언어는 왕 자신이 만든 이상한 문자를 쓰며, 땅면적은 집과 안뜰이 국가 전 영토이다. 총인구가 7명(가족과 친척들)인 나라이다.



육군과 해군이 있으며 공군은 조직 되어 있지 않다. 육군은 병력 2명(대통령과 그의 아들)으로 총기는 루이 13세 전장식 모스키토 소총을 쓴다.

해군 병력 2명(역시 육군 역할을 하던 인원이 해군 역할도 함)으로 민수용 고무보트가 1척, 4kg 고무보트가 2척을 보유 했다. 수병의 무장은 역시 모스키토 소총

또 다른 콜럼버스를 찾아서! -Venture Capital을 움직이게 하는 아이디어

또 다른 콜럼버스를 찾아서! -Venture Capital을 움직이게 하는 아이디어

 올해의 마지막 정기 세미나,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추위에 떨던 그 순간, 우리는 현 시대의 이자벨라 여왕과 대면하게 된다. 아직도 Venture Capital이라는 개념이 생소하기만 한 우리에게, 임지훈 심사역님은 ‘이자벨라 여왕’과 ‘콜럼버스’ 이야기를 하며 인류 최초의 Venture Capital에 관해 설명해주셨다. 보이지 않는 엄청난 위험(risk)을 감내하면서도 발견하게 될 신대륙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최초의 벤처 캐피탈리스트인 이자벨라 여왕의 투자 방법이었다. 현대의 벤처 자본도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이들의 역할도 아무것도 내세울 건 없지만, 확신에 찬 아이디어 하나만큼은 내세울만한 매력적인 그들에게,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회제공을 통해 서비스 제공에 관한 조언을 할 수 있는 권리, 혹은 이사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성공할 경우의 이익을 나누어 받는 것도 물론이다.

  아직도 불투명한 리스크에 투자하는 그들을 향해 사람들은 묻는다. ‘왜 벤처투자 하시나요?’라고. 뻔한 질문 같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들 중에는 심지어 벤처에 투자하는 그들의 행동을 중소 기업을 돕기 위한 자선 활동의 일부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고. 그러나 여기서 밝히는 바, 그들이 모든 벤처에 투자하는 것은 아니다. 벤처 자본에도 그들 나름의 투자 기준이 있다. 새롭고(new), 급속도로 성장하는(rapidly growing) 사업이어야만 투자한다는 것이다. 사실 돈을 꿔주는 입장에서, 이 정도의 기준은 갖고 있을 법하다. 심지어 상당수의 M&A를 추진해 온 ‘구글(www.google.com)’의 경우에도, 트래픽이 아주 높다거나, 기술이 도무지 구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라거나 하는 이유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 자체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적어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 이 시장이 얼마나 커져있을지를 예측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미나에서 제시된 한 만화는 이러한 비전을 갖추지 못한 venture capitalist들을 조롱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3년 정도의 시간도 벤처 기업들에게는 얼마나 큰 역전을 몰고 올 수 있는 시간인지를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투자를 하면 20% 정도만 대박이 나지만, 그 수익만으로도 은행 이자율보다 높은 수익률을 달성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소 고요한 느낌의 우리나라 웹2.0 서비스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최근 새로이 제공되었던 서비스들의 경우 미국의 웹2.0 사이트들을 카피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사용자들의 반응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이트의 서비스를 외국에서 카피하여 사용한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 무엇보다 경쟁적인 서비스 제공 환경과 까칠한 이용자들의 성향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나라 웹2.0 서비스들에도 희망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웹 생태계를 꿈꾸는 우리들이 이들의 자본을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신대륙을 향한 포부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역시 지도가 아니었을까?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지도, 바로 사업계획서다! 강연자분께서는 구체적인 틀이 있을 것 같지만, 결국 사업 계획서라는 것도 맞춤이라 ‘사업마다 다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셨다. Team, Problem & Opportunity, Problem & Opportunity size, Solution & benefits, Competitive Advantage, Market Strategy, Business model, Financial Projection, Schedule, 이렇게 9가지로 구성된 필수요소들은 자체의 설명만으로도 방대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제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점이 좋은지, 그리고 이렇게 좋으니까 ‘너도 쓰고 싶지 않냐?’로 이어가는 논리의 전개였다. 기업가의 10가지 거짓말이라고도 불리는 허풍들보다, 가트너의 보고서들보다, 진솔한 ‘needs'에 관한 고민이 바탕이 되어야만 비로소 벤처자본의 마음과 자본은 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굉장히 다양한 내용들을 포함시키라는 사업계획서에 좌절하는 우리에게, 그러나 ‘지금 시작하십시오!’라며 어깨를 토닥여주던 강연자 분은 오늘도 새로운 콜럼버스의 신대륙 찾기를 돕고 계실 것이다. 우리 모두도 콜럼버스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긴긴 겨울 방학, 신대륙을 마음속에만 품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지도를 그려보는 것으로 첫 걸음을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2008년 12월 27일 토요일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슬람 교의 호전적인 성격과 무력을 이용한 강압적인 종교 전파를 강조하는 말이죠. 이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처음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서구인들이 이교도(서구인들 기준으로)에 대한 위기감으로 인해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한 것이죠. 당시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하였고, 이슬람의 정복 과정에서 강제 개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개종하지 않더라도 지즈야(일종의 세금)만 내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죠. 「코란」에도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코란 2:256)'라는 말이 있답니다. 또한 이슬람 세력이 진출한 지역은 그들이 후퇴한 이후에도 다른 종교로 돌아서지 않았음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문화권으로 남아 있는 것을 봐도 이들이 강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강제로 개종시킨 것이었다면 곧 이슬람 교를 버렸을 테니까요.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슬람 교도들이 테러나 자행하는 무자비한 무리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이슬람에 대한 뉴스가 대부분 테러나 전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이것은 서구의 시각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라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슬람 교를 바라보세요!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고기야 미안해"

 2006년 9월부터 가족처럼 지내던 고기가 죽었습니다.
계속 함께 살다가 일 때문에 8월부터 친구한테 맡겼거든요.
조만간 데려오려고 했는데 너무 안타깝네요...

아래는 고기 사진입니다.

"고기야 안녕...미안해ㅠ_ ㅠ"





2008년 12월 21일 일요일

아르헨티나 와인을 만나다!

아르헨티나 와인

1. 아르헨티나 와인 이야기

근래에는 제3국이 새로운 와인 강국으로 급부상하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르헨티나 와인은 독특한 맛과 개성으로 인해 그 시선이 더욱 주목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와인은 남미 와인의 정수이자, 우수한 와인 대열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와인 생산국이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의 생산국이다. 하지만, 이 나라는 와인의 많은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해외 수출은 5%에 불과하고 거의 자국민들이 소비한다. 40L는 아르헨티나 국민 한 사람의 연간 와인 소비량이다. 2002년 약 15억7960만L의 와인을 생산해 낸 아르헨티나의 전체 인구는 3800만 명이 넘는다. 40L는 750L짜리 와인 53병이 된다.

아르헨티나 와인의 역사는 1556년 이곳에 온 예수회가 꾸요(Guyo)지방에 처음으로 포도 묘목을 심은데서 비롯된다. 여기서 시작된 두 종류의 포도품종 즉 끄리오야 그란데(Griolla Grande), 쎄레사(Cereza)가 오늘날 아르헨티나 포도 수확량에서 각기 30%, 10%를 차지한다. 끄리올라와 쎄레사 모두 분홍색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끄리올라는 칠레의 파이 포도종이다.

아르헨티나 포도 지방은 대부분 안테스 산맥이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가르는 이 나라의 내륙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고지대인 까닭에 온화하지만 그래도 낮에는 대단히 덥고 밤에는 서늘하며 건조한 사막지대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데스 산맥에서 시작되는 강들을 이용한 물대기 재배가 필수적이다.

아르헨티나의 주 포도 산지는 멘도자와 산후안이다. 멘도자 지방은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쪽 1000km에 위치하며 총 생산량의 70%를 생산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을 끼고 있는 천혜자원의 무공해 청정지역인 멘도자는 환경적인 면에서 와인 생산지로 최적이다. 산 중턱에 위치한 포도밭은 양질의 태양을 가득 받고, 안데스 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흐르는 멘도사강으로부터 관개시설을 이용해 천연수를 받는다. 포도 품종은 끄리올라, 말벡(Malbec) 등이다. 말벡(Malbec) 품종의 레드와인과 토론테스(Torrontes)종의 화이트 와인은 전 세계적으로 그 향과 맛에서 최상의 와인으로 쳐준다. 말벡 레드와인은 붉은 앵두색을 지녔으며, 향은 자세히 맡아보면 자두맛, 건포도맛, 커피, 초콜릿, 바닐라, 바이올렛 꽃향을 지녔다고 한다. 토론테스종의 화이트 와인은 초록빛이 약간 감도는 금색으로, 향은 장미, 오렌지 껍질, 복숭아, 꿀, 금못향을 가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최대 와인 생산지답게 멘도자는 남반구의 가을 추수기인 3월에 포도축제를 성대하게 거행한다. 축제기간 동안엔 15만~20만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아름다운 포도아가씨 선발을 참관하기도 하고,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색색의 퍼레이드도 관람한다.

산후안 지방은 멘도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 생산량의 20%가 이 지역에서 나오고 있으며 포도 품종은 무스까델, 페드로, 시메네스 등이다. 멘도자 보다 훨씬 덥고 건조하며 멘도자 전체 포도 경작면적의 약 3분의 1정도 되는 포도 농장이 들어서 있다.

아르헨티나 와인 용 백포도에는 페드로 기미네츠, 무스까델, 스폐인의 토론테스, 셰닝블랑, 세비용, 리슬링, 샤르도네 등이 있다. 적포도에는 템프라닐로, 바르베라, 람브루스코, 까베르네 쇼비뇽, 피노누아, 시라 등이 있다.

2. 아르헨티나의 와인

*까도네 샤베이즈- 풍부한 열대과일향에 배와 광물향이 더해진 까떼나 샤도네이는 오크향과 신선한 산미로 특별한 균형을 이룬다.

까떼나 자파타 (Catena Zapata)에 관하여

100여년 전에 이태리 Marche에서 와이너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Nicola Catena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1902년 Mendoza에 와이너리를 설립하여 곧 아르헨티나의 최대 와인 생산업자로 성장하였다. 1963년 현재의 소유주이자 창업자의 손자인 Nicolas Catena가 가족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와인생산을 다양화하고 규모를 늘려 1970년대에 와서는 아르헨티나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규모의 와인생산업자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1982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초빙교수로 있는 동안 Robert Mondavi 와이너리를 수 차례 방문한 Nicolas Catena는 높은 수준의 프랑스 와인에 맞먹는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과감한 시설 투자와 선진 기술 등을 보고 큰 영감을 얻어 자신도 Mendoza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을 결심했다.

1983년 Mendoza로 돌아와 기후, 품종, 토양 등 모든 분야에 연구를 거듭하여 생산량은 작아도 세계적인 수준에 걸맞는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포도생산에 몰두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와인 산업에서는 무모하게만 보였던 "less means more"의 혁신적인 개념과 세계 최고를 자처하는 완전 관개 기술에 의한 포도 생산은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와인품질의 고급화에 성공하여 그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1991년에 처음 미국으로 수출을 하자마자 미국의 와인 애호가들은 그 품질과 매력적인 가격으로 선풍적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고 와인 비평가들도 칭찬을 하였다.

현재 그 딸 Laura가 합세하여 고지대이자 건조지역인Mendoza의 독특한 토양과 기후를 이용하여 각 포도 품종을 최대한 표현하는 품질의 아르헨티나 와인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Nicolas Catena Zapata, Catena Alta, Catena, Alamos, Argento 의 브랜드로 전 세계의 주요 와인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끄로타 말벡-아르젠티나 최고의 와인생산지 Mendoza 지역에서도 뛰어난 바디, 아로마, 색상을 지닌 와인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와인. 바이올렛빛이 감도는 색상과 잘 익은 베리의 아로마가 다양한 풍미를 선사한다.

*노통 프리바다-진한 루비빛을 지녔다. 잘 익은 베리, 체리의 아로마와 살짝 느껴지는 향신료의 향이 잘 조화된 와인이다. 과일의 농축미가 뛰어나 깊고 우아한 풍미를 느낄 수 있으며 잘 숙성된 탄닌의 깊은 맛이 마시고 난 후에도 입안 가득 향기롭고 복합적인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피노누아 뜨리벤또-아름다운 선홍색을 띠며, 체리, 딸기, 바이올렛 향기를 풍긴다. 맛이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심오하다. 붉은 색을 띠는 육류요리뿐만 아니라, 연어구이 등 그릴드한 생선요리에도 잘 어울린다.

트리벤토(Trivento)에 관해서

1998년 칠레의 가장 큰 와인생산업체인 콘챠에토로(Concha y Toro)가 투자한 Vina Patagonia가 설립되어 최상급 품질의 와인인 트리벤또(Trivento)를 생산한다. 이 와이너리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포도를 많이 생산하는 멘도자(Mendoza) 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충분한 태양과 서늘한 밤 기운으로 포도나무가 생산되기에 좋은 지역적 여건을 가지고 있다. 트리벤또의 와인들은 과일맛과 향이 풍부한 우아한 스타일을 추구한다. 콘챠에또로의 노우하우와 기술력 그리고 상업적인 전문성을 잘 받아들여 전세계로 수출하면서 점차적으로 그 명성을 얻어가고 있다.

3. 아르헨티나 와인의 현재

아르헨티나 와인시장에 변화가 온 것은 10여년 전인 1990년대부터. 무엇보다도 그간 아르헨티나 인들이 가졌던 질보다 양이라는 와인 컨셉이 점차 고급와인을 애호하는 분위기로 변했기 때문이다. 양질의 고급와인을 선호하는 애호가들이 늘면서 와인을 통한 고급 사교문화도 형성되어 갔다. 반면 질로 승부하는 프레미엄 와인을 찾는 이들이 늘어감에 따라 1인당 와인 소비량은 급감하기 시작했다. 국내 시장에 남겨진 와인을 처리하는 데 곤란을 느끼게 된 아르헨티나 와인 제조사들은 해외 와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르헨티나가 와인대국으로 성장한 배경엔 여러 와인 제조사의 노력이 담겨 있다. 노르톤(Norton)사의 경우 세계 40여 개국으로 와인을 수출하고 있으며, 최근엔 중국에서 재배용 포도밭을 샀다. 니에토 세네티너(Nieto Senetiner)사는 연간 1200만병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으며, 멘도자 포도원에서는 와인창고투어, 포도 가지치기, 포도 수확하기 등 프로그램을 통해 와인 애호가들을 맞고 있다. 이밖에 유기농 밭에서 재배되는 포도로 와인을 생산해 생산량의 75%를 벨기에, 미국, 독일, 영국 등으로 수출하는 중소 와인제조사도 있다. 신흥 와인국으로 성장한 아르헨티나는 2페소(800원)부터 시작되는 저가의 테트라팩 와인부터 생산량이 한정된 양질의 고급 프리미엄 와인까지 모든 종류의 와인을 생산해 내고 있다. 1200여개의 와인 제조사들이 최상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정열과 땀을 쏟고 있는 만큼 아르헨티나는 머지않아 신흥 와인국에서 벗어나 세계 최고의 와인국으로 부상할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2008년 12월 17일 수요일

ؤرصة سيدة٠

ؤرصة سيدة٠ 

 2009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 참 빠르네요.
블로깅을 시작한지도 오늘이 딱 한달째입니다. 겨우 한달이지만 즐거운 일도 많았고, 기분 상한일도 많았으며, 또 많이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학교 언론사 편집장을 하는 동안 글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알게된 저는 블로그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직접 블로그를 개설하는 것이 쉽지는 않더군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눈팅만 하다가 한달 전에 화현(직장동료?ㅋㅋ)님의 도움으로 티스토리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마침 디자인에 관심이 많던터라 아는 웹디자이너들에게 졸라서 마침내 내 머리속에 있던 디자인을 그대로 구현해내는데(블로그 상단 디자인) 성공했습니다ㅎㅎ 물론 모두가 제 디자인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만족했으니 된거죠ㅋ 그리고 블로그 개설된지 열흘만에 포스팅한 글이 다음블로거뉴스 베스트글이 되는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역시 화현님의 도움을 받아 구글에드센스도 달아보고, 결국 다음 에드클릭스를 지금까지 달고 있습니다. 그렇게 블로그 만든지 2주만에 조회수 5만을 돌파하고, 파워블로거의 길은 순탄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던 저는 사소한 실수로 다음블로거뉴스 30일 발행정지가 되었고....
지금까지 다음블로거뉴스에 발행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다음블로거뉴스가 트래픽의 대다수를 몰아줬기 때문에 급격히 밑으로 떨어지는 그래프를 보면 한숨만...ㅠ_ ㅠ 그러나 그 동안의 애정 때문에 이 블로그를 버리진 못하고, 30일이 지나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중간에 테터캠프에 참여했던 일도 기억이 나네요. 테터툴즈나 텍스트큐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블로깅을 막 시작한 초보 블로거였지만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티스토리팀에서 발표하는 프로젝트 프로토스를 지금도 기대하고 있고, ck님의 강연 또한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사실 2008년도  끝무렵에야 블로깅을 시작한지라 '2008 블로그 결산'과 같은 거창한 태그는 좀 부담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이벤트를 위해!ㅋㅋㅋㅋ
 2009년도에는 꼭 파워블로거가 될겁니다! 블로거 여러분 반갑습니다.

2008년 12월 15일 월요일

불후의 명곡, We are the world


"우리는 (하나의) 세계이며 우리는 (같은 하나님의) 자손입니다.
우리는 함께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베풀어요.
지금이야말로 우리 삶을 구원할 기회입니다.
맞아요, 우린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해요.
바로 당신과 내가 말이에요"



 아프리카 난민 구호를 위해 미국의 팝 가수들이 모여 부른
 유명한 곡 ‘We are the world’의 가사 내용입니다. 'We are the world’는 미국의 가수이자 인권운동가인 해리 벨라폰테가 기획했습니다.
1984년 밥 겔도프 등 영국 아티스트들이 만든 자선앨범 ‘두 데이 노우 이츠 크리스마스’(Do They Know It’s Christmas)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네요. 에티오피아 기아 희생자들에 관한 뉴스를 접한 뒤 그는 거물 매니저 켄 크라겐과 함께 완전 무보수 자선 앨범 제작에 함께 할 대형 가수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초특급 가수 45명이 동참했습니다.
 7분여의 발라드인 ‘We are the world’는 라이오넬 리치와 마이클 잭슨이 작곡했습니다. 녹음은 1985년 1월28일 할리우드의 A&M 스튜디오에서 했습니다. 한 매니저가 “곡이 로커에게 걸맞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등 녹음 과정이 순탄치 않았지만 모든 녹음이 12시간 만에 마무리 됐습니다. 3월7일에 발매, 첫주에 80만장이 팔리고 미국 내 각종 음악차트에서 3주 연속 1위에 오르는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다.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7백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BAND AID, 그들이 오늘이 성탄절이라는 것을 알까요?



1984년 11월 어느날 밤, 아일랜드 출신의 한 젊은 록 싱어 '밥 겔도프(Bob Geldof)'는 아내와 함께 BBC 방송의 뉴스를 느긋하게 신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빈곤에 찌든 장면이 5분간 화면을 가득 채우는 에티오피아의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뉴스를 접한 '밥 겔도프'는 자선기금 모금의 일환으로 스페셜 레코드를 만들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실상을 보기 위해 아프리카에 직접 찾아가기에 이릅니다. 그는 뉴스에서보다 더 참혹한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았고,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1985년 3월 TV를 통해 전세계에 중계되는 마라톤 공연을 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고, 공연을 위한 세부 사항등을 정리하며 뮤지션, 레코드사, 프로덕션 등에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주었고, 그들은 기꺼이 아프리카인들을 돕기 위해 나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라이브 에이드(Live Aid)의 첫 공연이 성사되었고, 모든 문제들은 각자가 대의를 위해 감수하기로 합니다. 영국 최고의 뮤지션이었던 그들은 좁은 대기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밥겔도프는 단 하루이지만 세계인들을 TV앞에 불러놓고 고통과 실의에 빠진 아프리카인들을 돕는다는 꿈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Do They Know It's Christmas Time?'은 1984년 UK 크리스마스 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영국과 미국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앨범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1984년 한 음악인이 시작한 '밴드 에이드'는 미국의 뮤지션들을 자극해서 바로 전에 포스팅한 USA For Africa'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수퍼스타였습니다. 이러한 음악들이 계속 나오기를 바랍니다.


BAND AID 참여자 명단

The original Band Aid ensemble consisted of (in sleeve order):
Phil Collins (Genesis)
Bob Geldof (The Boomtown Rats)
Steve Norman (Spandau Ballet)
Chris Williams (Iron Static Overdrive)
Chris Cross (Ultravox)
John Taylor (Duran Duran)
Paul Young
Tony Hadley (Spandau Ballet)
Glenn Gregory (Heaven 17)
Simon Le Bon (Duran Duran)
Simon Crowe (The Boomtown Rats)
Marilyn
Keren Woodward (Bananarama)
Martin Kemp (Spandau Ballet)
Jody Watley (Shalamar)
Bono (U2)
Pinky and Perky
Adam Clayton (U2)
Paul Weller (The Style Council, and previously The Jam)
James "J.T." Taylor (Kool & The Gang)
George Michael (Wham!)
Midge Ure (Ultravox)
Martyn Ware (Heaven 17)
John Keeble (Spandau Ballet)
Gary Kemp (Spandau Ballet)
Roger Taylor (Duran Duran)
Sarah Dallin (Bananarama)
Siobhan Fahey (Bananarama)
Sting (The Police)
Pete Briquette (The Boomtown Rats)
Francis Rossi (Status Quo)
Robert 'Kool' Bell (Kool & The Gang)
Dennis Thomas (Kool & The Gang)
Andy Taylor (Duran Duran)
Jon Moss (Culture Club, former member of Adam and the Ants)
Rick Parfitt (Status Quo)
Nick Rhodes (Duran Duran)
Johnny Fingers (The Boomtown Rats)
David Bowie (who contributed via a recording that was mailed to Geldof and then dubbed onto the single)
Boy George (Culture Club)
Holly Johnson (Frankie Goes to Hollywood)
Paul McCartney (Wings and The Beatles, who contributed via a recording that was mailed to Geldof and then dubbed onto the single)
Stuart Adamson (Big Country)
Bruce Watson (Big Country)
Tony Butler (Big Country)
Mark Brzezicki (Big Country)

 

2008년 12월 12일 금요일

그날이 오면,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의 노래

 나날이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있습니다. 개성공단의 상주 인력이 반으로 줄고, 남북한 핫라인이 단절되고, 지금 열리고 있는 6자회담도 도무지 진전이 안되는 등 이명박 정부가 정권을 잡은 뒤로 계속 남북관계는 암울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닌 우리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아래 동영상의 노래 '그날이 오면'은 이승철, 김건모, 신화, 이효리 등 톱가수 40여팀이 참여한 통일음반 "사랑-통일염원 프로젝트"에 수록된 곡입니다.
 한국 연예제작자협회가 제작에 나선 이 음반은 8.15광복 60주년을 맞아 대중문화차원에서 통일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대표곡인 '그날이 오면'을 비롯한 창작곡 4곡은 작곡가 최준영이, 리메이크곡 10곡은 하광훈이 만들었습니다. 타이틀인 '그날이 오면'은 호소력 있는 멜로디와 빅스타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로 이미 인기를 얻었고, 그 외 리메이크곡들은 모두 북한과 해외동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노래들입니다.

 앨범에 참여한 가수들 : 거미, 김건모, 김범수, 김종국, JK김동욱, 더 자두, 마야, 박상민, 화요비, 변진섭, 서현수, 세븐, 신화, 옥주현, 은지원, 이승철, 이애숙(코리아나), 이정현, 이효리, 인디고, 전인권, 조은, 조수미, , 쥬얼리, 최진희, 최현수(바리톤), 태진아, 페이지, 플라워, 코요태, 휘성, NRG, WAX, UN, VOS



그날이 오면

[박상민] 수없이 계절은 바껴도
[이효리] 변치않는 단 하나
[옥주현] 그대를 향한 내 그리움
[김종국] 그리워 너무 그리워

[김범수] 우리의 이별은 너무 길다
[세븐] 이젠 만나야만 한다
[휘성] 서운한 마음은 모두 잊자
[신화] 우리는 하나니까

[거미] 우리의 소원은 단 하나
[이정현] 다시 만나야만 한다
[왁스] 너와 나 두 손 꼭 잡고서
[화요비] 기쁜 노래를 부르자

[이승철]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다시 만날 그 날
[김건모] 기쁨과 행복의 눈물로 세상 가득할 그 날을

[전체]
그리운 백두산 산새 소리
한라산이 춤을 출 때
가슴에 맺혔던 애닲음이
이제야 녹는 구나
우리의 소원은 단 하나
다시 만나야만 한다
너와 나 두 손 꼭 잡고서
기쁜 노래를 부르자
통일 노래를 부르자

 

2008년 12월 11일 목요일

레바논, 천국과 지옥의 혼재


수도 베이루트(Beirut)

 중동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 도시는 프랑스 파리와 자매결연이 되어있다. 레바논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 인구는 150만 안팎이다. 서울특별시의 한개 구 정도의 면적에 두개구 이상의 인구를 합쳐놓은 사람들이 사는지라 인구밀도는 매우 높다.

 

*베이루트 시내전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는 두 개의 도시가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동베이루트와 남베이루트가 천지차이를 이룬다. 동베이루트는 레바논 인구의 41%를 차지하는 카톨릭 기독교도 마로니테스(Maronites) 의 거주지역이다. 동베이루트의 전경은 그야말로 파리를 중동으로 옮겨온 것과 다를바 없다. 전쟁 전에는 지중해에서 최고의 휴양도시중 하나였던 베이루트. 동베이루트에 한해 아직 그 말이 유효하다. 고급승용차가 거리에 즐비하고 빌딩들이 우뚝 솟아 있으며 남녀 쌍쌍 모여 다니고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자랑한다. 여자들의 노출도 이곳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동베이루트는 이슬람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격당해 폐허가 된 남베이루트

 반면, 남베이루트는 아귀지옥이다. 남베이루트는 레바논의 국제적으로 악명높은 테러조직 헤즈볼라가 속해있는 종파인 이슬람 시아파 주민들의 거주지역이다. 시아파는 레바논 전체인구의 25%를 차지한다. 즉, 이스라엘 공군이 베이루트를 폭격했다는 말은 사실은 동베이루트가 아닌 남베이루트를 폭격했다는 말이다. 동베이루트는 애초에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대상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은, 완전 다른 도시라는 것이다. 남베이루트의 상황은 처참하다. 길거리의 건물들은 폭격을 당해 모두 폐허가 되어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폭탄이 터지며 도시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있는 아비규환의 상태이다. 밤마다 공습의 공포에 시달린다. 남베이루트는 죽은 도시다. 길거리에는 인적이나 차량을 찾아보기 힘들다.

 
레바논의 1인당 국민 소득은 7천불. 우리나라의 반 수준이고, 태국과 비슷하지만 태국보다는 약간 우위에 있다. 이 나라는 세개의 종파가 각기 다른 공동체를 이루면서도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는 조화속에서 살아가는 평화로운 나라였고 십여년전에는 최고의 휴양국가로 손꼽히는 지중해의 꽃이었다. 이 나라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것은 역시나 종교 때문이다. 레바논은 마로니테스 41%, 이슬람 50%(시아파 25%, 수니파 25%)로 구성되어 있다. 민족은 아랍인이지만 여타 중동의 아랍인들과는 조금 달라 생김새가 유럽에 가깝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나 동베이루트 지역에서는 프랑스어나 영어가 사용가능하다. 레바논은 전체적 인구 비율로 보아서는 이슬람 인구비율이 50%가 넘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이들은 수니와 시아로 구별되기 때문에 최대정파를 이끌고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나라의 주류종파는 41%의 마로니테스들이다. 이 탓에 레바논은 터키와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가 불법인 세속주의국가다. 이 나라는 아랍 최대의 연예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아랍국가 청년들은 (가부장 아버님의 눈길을 피해)레바논TV를 시청한다. 여자 가수나 여배우들의 공공연한 노출이 가능한 곳이 중동에서는 유일하게 레바논 하나뿐이다.

 

 *미스 레바논 출신의 레바논 여가수 하이파 와흐비(Haifa Wahbe). 그녀는 남베이루트 출신이고,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하지만 레바논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과도한 노출(?)이 문제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레바논도 한계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올해 나이로 30세. 한 번 이혼한 전력이 있는데, 역시 이슬람인구가 반이 넘는 국가답게 아직도 커스터디 로(Custody law)가 적용된다. 그녀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이혼 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우디 배불뚝이 석유재벌이 던져주는 고급 승용차와 향수에 혹해서 약혼까지 갔다고 하니, 그녀가 딸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애끓는 모성을 소유한 것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자연히 동정이 가지도 않는다. 아, 한 가지 더. 오빠가 24살 때에 이스라엘과의 교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증오한다고 한다.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

 헤즈볼라는 이슬람 시아파에 속하는 레바논의 정당임과 동시에 무장조직이다. 헤즈볼라는 무장조직이긴 하지만, 선거를 통한 정당한 방식으로의 이슬람 국가 건설에 목표를 두고, 여러 사회 복지 시설도 많이 운영하는 비교적 온건한 단체로 레바논 국민들도 처음에는 그들에 대해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그를 돕고 있는 미국을 증오한다. 흔히들 시아파라고 하면 무장 테러집단을 떠올리고, 수니파는 온건한 이슬람 종파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한참 잘못된 오해이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테러조직의 대부분은 수니파이다. 헤즈볼라만이 규모가 큰 시아파 테러조직이다. 수니파가 온건하다는 것은 그만큼 말 안 통하고 고집스럽게 이슬람 식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수니파는 코란의 해석을 자신들의 정통식 이외의 다른 방면으로 접근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반면 민주화를 이룩해내 상당수준의 여성복지와 여성참정권을 만들어낸 이란은 시아파다. 시아파는 소수파이긴 하지만 과격파는 아니다.  헤즈볼라의 테러수준은 알카에다의 그것에 비교하면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이집트라면 이를 갈기 때문에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밉살맞은 이슬람에게 폭탄을 떨어트릴 괜찮은 트집거리가 된것이다.

 레바논은 아직도 치안이 불안하다. 수도 베이루트의 한부분에서는 여전히 지금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동베이루트에서는 메르세데스 벤츠 안에서 오렌지족 남녀가 서로 좋아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있다. 레바논 기독교사회는 이스라엘의 공습이 레바논 전체에 대한 공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그래도 같은 나라 국민인데, 시아파 사람들을 구호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물자를 지원하는 정도이다. 세 종교가 섞여 사는 나라 레바논. 천국과 지옥이 혼재하는 나라 레바논. 그렇기에 앞으로 어찌될 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나라, 바로 레바논이다.

 

*레바논 국기. 가운데의 삼목은 레바논에서 가장 많은 수종이다.

 

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이슬람 정복기의 군대


예언자 무함마드의 시대

1. 무슬림 지휘관-7세기 중반 : 부유하고 잘 무장된 이 지휘관은 쇠사슬 코이프와 어깨 드림 위에 비잔티움에서 유래된 형태의 조립식 투구를 쓰고 있다. 매우 긴 쇠사슬 호버크는 일반적인 형태인듯 하나, 강화된 가죽 러멜러 흉갑은 그렇지 않다. 칼은 아마도 사산조나 인도의 양식일것이며 가죽 방패와 신은 근처의 누비아에서 보이는 형태에서 유래되었다.

 2. 무슬림 궁수-7세기 초중반 : 이 가난한 병사는 그의 칼을 넝마로 감쌌고 가죽 끈을 감아 머리를 보호했다. 그의 활은 Grewia tenax라는 나무에서 베어낸 간단하 형태의 활이며, 짧은 화살은 돌화살촉을 쓰고 있다. 튼튼한 나알-샌들-을 신고 카미스-긴 소매를 가진 튜닉-을 입고, 전통적인 아라비아의 의상인 이자르-어깨와 몸통에 두르는 천-을 입고 있다.

3. 베두윈 족장-7세기 초 : 7세기의 아라비아 반도의 정주민과 베두윈들 사이에서는 의복의 차이점을 찾을수없지만, 남부와 북부에서는 옷차림이 다르다는것이 드러난다. 그의 올린 머리 형태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미술품에서 보인다. 쇠사슬 디르(갑옷) 위에 앞이 뚫려있는 주바(jubba)를 입고 있으며 갑옷 아래는 이자르를 입고 있다. 낙타의 안장은 수백년간 아라비아에서 쓰여오던 것이며 가죽으로 된 등자가 있다.


무슬림의 대정복

1. 안사 전사-7세기 중반 : 안사-예언자의 돕는 사람들-들은 '인도된 칼리프'들의 정예병력이 되었으며 그들의 장비와 무기등은 여러곳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다. 이 병사는 하얀 펠트 모자-칼란수와-를 그의 투구 위에 쓰고 있다. 노란색 터번은 그가 안사임을 나타낸다. 실로 짜여진 가는 벨트와 수대-어깨부터 허리까지 칼을 차기 위해 만들어진 띠-는 가죽 벨트나 수대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을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장비는 긴 대나무 창과 전통적인 형태와 비슷한 짧은 칼, 그리고 약간 대칭이 맞지 않는 아랍 스타일의 활, 기름을 바른 가죽 방패이다. 어깨의 호버크 아래에는 속을 천 등으로 층층이 튼튼하게 채웠다.

2. 페르시아 아사와리아 기병-7세기 중반 : 옛 사산조 기병의 함라-붉은 얼굴의 사람들-의 일원이었던 이 병사는 사산조 최후의 시기의 무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넓은 철띠로 강화된 투구와 셔츠모양의 튜닉 아래 입은 짧은 사슬 호버크, 다리를 보호하는 란-장식된 각반-이 그의 무장이다. 활을 쏘는 오른손은 가죽끈으로 보호하고 있다. 아바르 양식의 긴 칼과 단검, 활은 두개의 나눠진 벨트에 고정되어있으며, 마갑은 북부 스텝의 영향을 보여준다. 안장에는 목제 등자가 달려있다.

3. 베르베르 보조병 : 무장이 매우 빈약한 이 베르베르 보조병은 조악한 직조 하이크와 코르크로 바닥을 댄 샌들을 착용하고 있다. 베르베르족이 지난 세기동안 그랬듯이 전투를 위해서 머리를 밀었고 창과 간단한 투석끈, 돌이 든 가방, 그리고 가죽 방패를 들고 있다.

우마이야조의 보병

1. 우마이야조 근위병-8세기 초 : 이 정예병이 쓰고 있는 철과 청동이 섞인 투구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됬음에도 이란과 이라크에서 대규모로 제조되었다. 그의 디르 호버크 밑에 있는 두라아-앞이 뚫린 튜닉-은 아랍에서 습관적으로 착용된것 같다. 수대에 달려있는 미끄럼 방지가 된 세겹짜리 칼집세트는 매우 특별한 형태인데 이러한 형태는 사마르칸트와 판지켄트(pianjikent)의 낙타를 탄 아랍 침략자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2. 우마이야조 보병-8세기 초 : 이 보병 궁수는 투구 위에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병사의 무장은 일반적인 우마이야조 보병의 무장을 보여준다. 그의 유일한 다른 방어구는 쇠사슬 디르이다. 천으로 된 카바와 솜으로 된 카미스(겉옷과 갑옷 안의 흰 옷을 말하는것 같은데, 어느게 카바이고 어느게 카미스인지 모르겠음) 아래에는 군사들이 입었던 바지 시르왈이 있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숄은 타얄산이라고 부른다.

3. 무슬림 여성-8세기 초 : 일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초기 무슬림 시기동안 매우 활동적으로 일을 했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집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기도 했다. 이 여성은 아마도 부유한 계층의 출신일 것이다. 고급 터번은 머리카락만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현재의 극단론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얼굴을 가리는것 보다 예언자의 본래 가르침에 더 가깝다.

우마이야조의 기병 
 
1. 발흐 총독-8세기 : 여기 이 총독은 갑옷 대신 고위 관료의 옷을 입고 있지만, 지방 총독들은 중무장을 했다. 시위를 매지 않은 채 활집에 들어있는 거대한 아랍활은 도보로만 사용할 수 있다. 몇몇 우마이야의 상류층 인사들은 보석류나 마스카라-코흘-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 자는 말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파지켄트의 벽화에서 보인다. 초기 형태의 칼란수와-모자-와 타야라산-목에 두른 흰 띠-를 쓰고 있으며 큰 장갑을 끼고 있다.

2. 우마이야조 정예 기병-7세기 후반 : 이란 출신의 병사들의 무장에서는 이란 갑옷의 영향을 받은점이 보인다. 이 병사는 미그흐파르-쇠사슬 드림-를 입고 있는데, 이 갑옷은 그의 옷 아래에 있다. 청동 러멜러 흉갑은 탄누르 또는 '자궁'이라고 알려졌다. 손에는 이란 양식의 건틀렛을 끼고 있으며 발은 사크 알 자르드라고 불리는 쇠사슬 각반으로 보호하고 있다. 방패는 나무로 된 채색방패이다.

3. 이집트의 우마이야 왕조의 경기병-8세기 중반 : 기후는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아랍 지방에서 중장갑이 드문 이유에 대한 답이 될것이다. 이 병사는 남부 누비아에서 온 악어가죽 투구-초기 중세시대에 쓰인 철제 러멜러 목 보호대가 곁들여 있다-를 쓰고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카미스 셔츠와 시르왈 바지위에 찬 두개의 벨트가 있는데, 첫번째 벨트는 실로 두껍게 짠 아랍의 양식이고, 가죽과 장식이 달린 가죽 벨트는 새로 나타난 투르크-이란의 양식이다. 낡은 가죽이 덧대여져 있는 안장에는 목재 등자는 달려있지 않다.


 압바스 혁명 
 
1. 후라사니 아랍 정예병-8세기 중반 : 이 정예병은 그의 터번과 모자 아래 둥그런 낮은 투구를 쓰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적인 형태의 갑옷인 디르에다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완갑(팔에 차는 방호구)을 쓰고 있다. '명예의 겉옷' 위에 금으로 된 타와-목걸이-를 쓰고 있는데, 이 목걸이는 전투에서 장교들을 구분하기 위해 주어졌다. 말에서 내린 채로 싸우기 때문에 칼은 등에 차고 있다.

2. 후라사니 아랍 기병-8세기 후반 : 이 병사는 바야다 투구와 미그흐파르를 입고, 투구 위에는 가죽 안감을 댄 모자-아마도 이 모자는 칼란수와 샤하시야일것이다-를 쓰고 있다. 전통적인 이란 양식의 카바 코트 아래에는 쇠사슬 호버크를 입고 있다. 이란의 샬와 바지 위에 정강이 갑옷인 란을 가죽끈으로 고정했으며 칸자르라는 단검, 도끼(타바르진), 투르크-이란의 합성궁으로 무장했다. 이 시기에 무슬림 궁수들은 손가락과 엄지 모두를 이용해서 활을 당겼다.

3. 페르가나 기병-8세기 중반 : 민족적인 기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기병은 투르크식의 높은 투구를 쓰고 있다. 앞부분에 솜털을 포갠 겉옷 밑에 쇠사슬 호버크와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정강이 갑주와 완갑을 착용하고 있다. 겉옷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가죽 러멜러 흉갑은 따로 입을때도 있었다. 말에는 코에 큰 금속 재갈끈을 매어놨고 안장의 뒷부분에는 분해된 천막이나 접은 깃발을 매어두는 막대가 매달려 있다.

 


압바스조-변경의 전사들 
 
1. 아나톨리아 국경 전사-9세기 초 : 많은 사료들이 동부 아나톨리아의 비잔티움 병사와 무슬림 병사사이의 장비의 유사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병사는 오직 터번을 통해서만 그가 무슬림이란걸 알아볼수 있으며 각 부분을 대갈못으로 고정한 철제 투구를 쓰고 있다. 실로 짠 두꺼운 검은 겉옷-두라아-아래에 보편적인 갑옷인 디르와 가벼운 가죽 부츠-쿠프-를 착용하고 있다. 그의 쭉 뻗은 양날검은 노획된 비잔티움의 무기에서 나타난다.

2. 압바스조 보병-9세기 초 : 여기 이 병사는 종려나무 잎의 줄기로 만든 투구와 가죽으로 감싼 갈대방패를 들고 있다. 이 방패는 중동에 몇세기전부터 알려져 온것인데, 다만 다른 것은 자신의 방패에 역청칠을 했다는 것이다.

3. 페르시아 기병-9세기 초 : 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많은 이란인 기병들은 이전보다 더 가볍게 무장한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보병이 덜 중시되고 기마 궁술을 더 중요히 여기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 기병은 새로운 형태의 칼란수와를 쓰고 있다. 짧은 쇠사슬 호버크는 철제 러멜러 흉갑아래 입었는데, 이러한 갑옷들은 전신부의 가슴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었다. 그는 또한 당시 이란에서 많이 쓰이던 굽은 세이버를 들고 있다. 말의 머리는 천을 덧댄 철제 마갑으로 보호하고 있고, 몸통과 목은 티즈파프라고 불리는 펠트를 층층히 쌓아 만든 마갑을 쓰고 있다.

 압바스조-궁중 
 
1. 굴람 근위기병-9세기 중반 : 노예 출신의 이들 굴람들은 처음 몇년간은 통치자의 가장 신뢰할만한 근위병들이었다. 이 굴람은 장식된 비단 두라아와 헐렁한 비단 바지를 입고 있다. 긴 머리는 아마도 그가 투르크족 출신이란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부족 출신들도 긴 머리를 했다. 활은 명백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것이나 화살통과 활집은 투르크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뺨가리개가 달려있는 투구는 많은 그림에서 보인다.

2. 아브나 보병-9세기 초 : 이 아브나 보병의 장비와 복장을 통해 그의 부대가 아랍군과 후라사니들의 혼합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터번 아래에는 양질의 이란 철과 청동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으며 그가 들고 있는 압바스조의 검은 깃발에는 쿠란의 구절이 쓰여있다.

3. 칼리프 무타와킬(847~861) : 칼리프는 터번 천 아래 걷어올린 가죽 목덮개가 달려있는 칼린수와 타윌라를 쓰고 있다. 어깨에는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미트라프를 두르고 있고 검은 가죽으로 만든 주바흐 아래 붉은 두라아를 입고 있다. 궁전 안에서 압바스조의 칼리프들은 카딥이라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으나 궁전 외부에서는 여기 보이는 간단한 형태의 외날 세이버를 가지고 다녔다. 다양한 형태의 검은 웃옷과 화려하게 장식된 허리띠, 그리고 이러한 지팡이나 칼은 압바스조의 표식이었다.

2008년 12월 8일 월요일

티스토리 달력 사진 공모

 오늘 테터캠프에서 달력 사진 공모전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달력에 쓰일거라고는 생각 안하지만 그냥 탁상 달력을 받고 싶어 올려봅니다^- ^*
참고로 사진은 2008년 5월 부산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사용한 카메라는 가장 애착이 가던 코니카미놀타 A2입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추억에 잠겨봅니다.

5월(May) 벚꽃과 개나리의 환상적인 조화

5월(May) 흐드러지게 핀 벚꽃 사이로 비친 쾌청한 봄 하늘 

5월(May) 벚꽃과 맑은 하늘이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2008년 12월 6일 토요일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 샤를마뉴


초기생애

 샤를마뉴는 샤를1세(Charle Ⅰ), 카알 대제(Karl der Grosse),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등으로도 불린다. 그는 742년경 4월 2일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 왕국의 권력은 궁재(宮宰)에게로 집중되었으며 샤를마뉴가 태어날 무렵엔 그의 아버지 피핀과 숙부 카를로만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어 프랑크 왕국을 장악한 직후였다.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라고 부르게 된 이 가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직을 세습하며 프랑크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왔다.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분열 직전에 처한 왕국을 재건했고 732년에는 투르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라센(이슬람)을 물리쳐 유럽과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공로로 인망이 있었다. 그는 힘없는 메로빙거 왕조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이름뿐인 국왕의 대권을 침해하지 않은 채 사실상 왕국을 아들인 피핀과 카를로만에게 세습하듯 물려주었다.

 샤를마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피핀은 왕족 및 자신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751년에는 힘 있는 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교황 자카리아스로부터 승인을 받아 실권 없는 메로빙거 왕가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킨 뒤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자카리아스의 후임 교황인 스테파누스 2세는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의 침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청하려고 754년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12세였던 샤를마뉴는 왕국의 장자로서 교황을 영접했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식(聖油式)을 집전해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 및 카를로만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 귀중한 봉사의 대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교황의 영지에서 축출할 것을 다짐했다. 피핀은 760년부터 해마다 원정을 해 아키텐(루아르 강 남쪽의 프랑스)을 정복함으로써 피레네 산맥까지가 모두 프랑크 왕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이 일련의 원정에는 샤를마뉴가 늘 동행했다.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은 아마 샤를마뉴의 성격과 목표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외적에 대항해 단호하게 싸우고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 가까운 친척들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결심도 아버지와 똑같았다. 샤를마뉴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일찍부터 인정했다. 그는 교회를 존중했고 크리스트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왕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 교회에 대한 왕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신이 그에게 크리스트교도들을 맡겼기 때문에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크의 왕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은 부르군트 일대를 다스렸는데 롬바르드 선왕의 왕비였던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롬바르드 왕 데시다리우스는 카를로만이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여 그를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동생과의 갈등에서 샤를마뉴는 승리했고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의 단일 지배자가 되었으며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샤를마뉴는 이교도인 작센족이 라인 강 하류 지역을 공격한 앙갚음으로 772년에 지금의 니더작센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사는 작센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775년부터는 복수보다는 작센족 전체를 정복하여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 왕국에 통합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는 여러 차례의 원정 끝에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작센족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775~777년에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작센족의 항복을 조인했다. 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샤를마뉴의 도움을 얻으려고 스페인 북부에서 찾아온 아랍인들도 끼어 있었다. 778년 여름 샤를마뉴는 스페인으로 진격해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는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브르타뉴 원정 때 활약했던 샤를마뉴의 기사 롤랑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전설과 시(롤랑의 노래)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토 보전에 힘쓰는 한편 내정을 강화하고 문화생활과 법의 지배를 보호했다.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패배한 직후 작센족이 다시 봉기했다. 샤를마뉴가 생각하기에 세례를 받고 충성을 서약한 이 작센족의 저항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로 이런 범죄에는 가혹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샤를마뉴는 작센족과 18회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그들을 완전히 정복했다. 결국 그는 작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겠다는 목표만이 아니라 제국에 완전히 통합시키겠다는 목표도 달성했다. 세속 권력과 크리스트교 신앙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은 작센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샤를마뉴는 781년에 2번째로 로마를 방문해 교황이 어린 두 아들 피피노와 루이(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관을 씌워주게 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황태후이며 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고 있던 이레네에게서 자신의 이탈리아 지배를 사실상 승인받았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787년에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한 뒤 샤를마뉴와 비잔틴 제국의 협약은 깨졌다.

 788년 샤를마뉴는 바이에른 공작이자 사촌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라인 강 건너편에 남아 있는 마지막 게르만족의 독립성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제 서게르만족인 알라마니족, 바이에른족, 작센족, 튀링겐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 단위 안에 모이게 되었다. 게다가 아바르 왕국(지금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과 도나우 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족 국가들도 느슨하나마 프랑크 왕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프랑크 왕국은 엄청난 팽창을 통해 중세 초기의 부족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도 필요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늦게야 떠올랐고 그나마도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까지 포함한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비잔틴 제국은 로마와 라벤나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보호를 받고 있던 교황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치령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서로마의 황제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가 옛날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황제 지위에 대한 합법성을 구체화해주었지만 동로마 황태후 이레네(797년 아들을 퇴위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었음), 즉 여성의 지배에 대항하려는 욕망도 그가 제위를 얻으려고 한 이유였다.

 비잔틴 제국은 제위 찬탈자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샤를마뉴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새로운 지위와 협상에서 얻은 로마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812년 비잔틴 제국 황제인 미카일 1세가 어쨌든 샤를마뉴를 황제로(로마 황제는 아니었음) 승인함으로써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샤를마뉴에게 어떠한 권력도 추가로 주지 않았지만 그의 로마 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754년의 사건, 즉 교황이 비잔틴 제국과 소원해지고 그 대신 프랑크 왕국과 친교 관계를 확립한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중세의 제국이라는 개념, 그리고 프랑크 왕국 및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적 전통이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고대 로마 제국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샤를마뉴가 가졌던 황제라는 칭호와 지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궁정과 행정

 제국의 창건은 주로 제국 내부의 문화 수준을 높이려는 샤를마뉴의 노력을 통해 합법화되었다. 샤를마뉴가 권력을 잡았을 때 프랑크 왕국의 문화, 행정, 사법 제도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이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일정한 주거지가 전혀 없었다. 따뜻한 봄 날씨 때문에 샤를마뉴가 특히 좋아한 아헨이 왕의 거처가 된 것은 794년에 이르러서였다. 샤를마뉴는 이곳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지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제국 전역의 종교의식과 도덕성 및 재판절차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 운동은 제국의 수많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최고의 지성들을 불러들여 성직자를 가르치게 하고 결국에는 백성 전체를 가르치게 한 샤를마뉴의 노력과 그의 궁정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궁정의 신학적 지식과 지적 자부심은 791년경에 샤를마뉴의 이름으로 작성한 포괄적 논문인 <샤를마뉴의 책 (Libri Carolini)>에 반영되어 있다.

 샤를마뉴는 이 궁정을 통해 제국을 다스리고 관리했으며 정의를 시행했다. 궁정과 제국 각지의 주요행정관 및 귀족들은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씩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나 정복한 영토에 모여 총회를 열었다. 이것은 군대회의나 귀족들의 입법회의 및 교회의 종교회의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은 카롤링거 제국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들과 궁정의 관계는 샤를마뉴의 명령에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는 왕의 사절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왕의 사절은 대개 2명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관리와 고위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명령은 글로 쓰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기 20년 전부터 왕의 포고령이 약간 애매하나마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의 포고령이 일정한 틀을 갖는 데는 시간이 걸렸으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 형식이 고안되었다. 샤를마뉴는 그가 지배하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원칙적으로 존중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 전통적 권리를 기록하게 했다. 프랑크 왕국의 법령집은 여러 부족의 율법을 보완하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공공생활과 개인생활의 가장 다양한 측면에 적용된 규칙이며 왕의 사절과 백작 및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내려진 특수한 명령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샤를마뉴 시대에 만들어진 법률 문서는 샤를마뉴가 사법 행정과 대중 계몽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준다.

 
통치의 한계

 그러나 샤를마뉴의 제국에 구조적인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제국의 모든 정치제도는 샤를마뉴의 뛰어난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1세 때 프랑크 제국의 양상을 보면 훨씬 명확하다. 샤를마뉴의 교육정책으로 자신감을 얻은 성직자들은 항상 샤를마뉴의 신권(神權)정치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교육적 원칙을 내세워 샤를마뉴의 신권정치에 반대하곤 했다.

 카롤링거 왕조와 함께 제국을 건설한 평신도 귀족들은 새로운 정복이 새로운 이권과 봉토를 약속해주지 않는 한 왕조와 확고한 유대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800년에 이르자 이미 도달한 국경선을 넘어 밖으로 더욱 팽창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다. 실제로는 이미 얻은 땅을 통합, 관리하며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과 기술적 수단도 불충분한 상태였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화폐 경제, 봉급을 받는 관리, 상비군, 정비된 도로망과 통신망, 해안을 지키는 해군)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샤를마뉴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해안은 노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806년에 샤를마뉴는 제국을 분할해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아키텐의 루이(경건왕 루트비히)를 공동 황제로 만들고 유일한 후계자로 삼았다. 샤를마뉴는 불과 몇 달 뒤인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성과 영향력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손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그의 제국은 2대 황제인 루트비히에서 끝났지만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갈기갈기 찢어졌던 서유럽 사람들이 그 후 몇 세기 동안 의지할 수 있는 공통된 지적, 종교적, 정치적 유산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물론 이런 유산이 샤를마뉴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궁정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이라고 불렀다. 사실 중세의 수백년 동안 유럽 역사에 그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국의 분열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자 그의 아들 루이트비히 1세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경건왕이라는 별칭도 얻었지만 난세를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제국 분열의 조짐은 루트비히 1세의 황후 에르멘가르드가 세 아들을 남기고 818년에 세상을 떠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루트비히는 게르만족의 상속 유풍에 따라 제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하기로 정해 놓았다. 장자 로타르 1세에게는 제위를 물려주어 제국의 중심부를, 차남 피핀과 삼남 루이 2세에게는 변경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르멘가르드가 죽고 4개월 후 루트비히는 유디트와 재혼하여 사남 샤를(대머리 왕 샤를 2세)을 낳았고 그에게도 상속권이 생겼다. 그것도 늦게 얻은 귀여운 자식이고 형들에 비해서 어린 연령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친으로서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상속 문제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루트비히는 829년에 회의를 소집하고 샤를에게 제국의 중심부를 준다고 선언해 버렸다.

 여기서부터 부자간 혹은 형제간에 추잡한 상속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타르는 아우 피핀과 일부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황후 유디트를 감금하고 로타르의 측근들이 궁중의 요직을 차지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루트비히가 일부 호족과 교회, 수도원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불리함을 느낀 장자 로타르는 교황청과 말을 맞추어 놓고 알자스에서 회의를 열어 아버지인 루트비히를 퇴위시키고 세 아들은 유디트의 아들 샤를을 배제하고 합의하에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이 합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1년을 못 넘기고 형제들 간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차남 피핀이 부친 루트비히와 손을 잡고 로타르에게 대항하였다. 호족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교회는 에르멘가르드의 아들들을 외면하였으며 수도원이 확실하게 루트비히를 지지하자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도망갔고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834년에 복위하였다.

 그 후 몇 년간 잠잠하였지만 차남 피핀이 죽자 부왕 루트비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땅을 샤를에게 주었고 840년에 루트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상속 분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843년에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을 삼분하여 로타르는 제호(帝號)와 중심부를, 삼남 루이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샤를은 제국 서쪽의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이래서 제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분할되었고 855년에 로타르가 죽고 세력이 약해지자 동프랑크의 루이와 서프랑크의 샤를이 870년에 메르센에서 다시 조약을 맺어 중프랑크의 로트링겐 일대를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세 나라의 출발이었고 그 판도도 지금과 비슷하였다.

 샤를 대제의 손자들은 이렇게 해서 영토를 얻었지만 그것은 오래갈 수는 없었고 결국 875년에 중프랑크에서, 이어 911년에 동프랑크에서, 987년에는 서프랑크에서 카롤링거의 왕통은 단절되었고 노르만인과 마자르인 그리고 이슬람인의 침입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자료 출처
http://mtcha.com.ne.kr/world-man/france/man32-syarulmanyu.htm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8304

http://www.nobelmann.com/history/history_.htm

http://cafe.naver.com/fatewhtenigh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29


 

미네르바 신드롬

 


 현재 대한민국의 최고 이슈메이커는 바로 익명의 누리꾼 미네르바다. 미국발 금융 위기를 족집게처럼 맞춰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을 이유로 절필을 선언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절필을 선언한 후에도 TV, 신문할 것 없이 모든 언론은 그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있다.

 진보, 보수를 가릴 것 없이 각 언론사마다 '미네르바의 정체'를 밝히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미네르바가 올린 글의 IP를 추적한 후, 자신의 블로그에 "미네르바는 1971년생으로 야구, 렉서스를 좋아하는 남성"이라는 추측을 했다. 한 진보 성향 언론사는 기자에게 "미네르바를 찾아 '정기 기고'를 청탁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동아> 12월호에 절필을 선언한 미네르바의 장문 기고가 실리면서 '미네르바 신드롬'은 극에 달한 듯하다. 이번 <신동아> 기고는 미네르바가 제3자를 통해서 먼저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 눈치를 보는 사주의 방침과 정반대의 기고가 <신동아>에 실린 까닭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네르바가 <신동아>를 선택한 것은 훌륭한 판단이었다. 긴 분량의 기고를 가감 없이 실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친정부 성향의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오프라인 잡지를 선택함으로써 '반정부 성향의 인터넷 논객'의 이미지도 상쇄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의 기고는 곧바로 온갖 매체로 옮겨져 수많은 시민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었다.

갈 데까지 간 미네르바 신드롬

 <신동아> 기고를 끝으로 미네르바는 절필을 선언했지만, 정작 미네르바 신드롬은 더 불이  붙었다. 20일 오전 언론이 서화숙 <한국일보> 편집위원의 '패러디' 칼럼을 놓고 벌인 해프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서 위원이 이명박 정부를 조롱하고자 언급한 '미네르바 경제 관료 기용설'을 <조선일보>, <중앙일보>, <오마이뉴스>, <데일리서프라이즈> 등이 사실로 알고 심지어 민주당 최재성 대변인은 이날 오후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미네르바를 경제 각료로 기용하겠다는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가 누구인지 밝히라"는 논평을 냈다가 황급히 취소하는 코미디를 연출했다. 이런 상황을 놓고 서화숙 위원은 <프레시안>과의 전화 통화에서 "한국 사회의 독해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혀를 찼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지극히 비이성적이다. 물론 미네르바가 등장부터 퇴장까지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적절한 요소를 두루 갖춘 것은 사실이다. "그는 대중이 불안해 할 때, 갑자기 '메시아'처럼 등장해 현실과 부합하는 진단과 대안을 내놓다, 권력의 탄압을 못 이겨 퇴장했다."(최영묵 성공회대 교수)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러나 정부, 언론이 혈안이 돼 미네르바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호들갑을 떠는 상황을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게 정부, 언론이 미네르바 신드롬을 부추길수록 정작 대중은 더욱더 미네르바에게 쏠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작 미네르바가 한국 경제를 위해서 쏟아냈던 수많은 고언은 사라지고 없다.

미네르바 신드롬, 누가 만들었나?

 그렇다. 지금 정부, 언론은 미네르바의 진단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취할 대목은 취해서 그가 그토록 걱정하는 파국이 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네르바가 누구인가, 이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차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행태야말로 미네르바의 충정을 무시하는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자칫하면 그의 경고를 듣고서도 대비를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네르바를 만들어낸 당사자는 바로 정부, 언론이다. 한 경제평론가는 미네르바 신드롬을 놓고 이렇게 평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전 국민이 알 수밖에 없는 걸 정부가 자꾸 숨기다보니, 이런 신드롬이 생긴 것이다. 정부가 제2, 3의 미네르바의 등장을 막으려면 금방 드러날 거짓말 대신 솔직한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의 말은 계속된다. "사석에서 정부에 몸담고 있는 공무원, 전문가를 만나면 모두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 알고 있다. 그렇게 정책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시그널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입을 꾹 다물고 직무유기를 하고 있으니 미네르바가 대신 그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통령은 현실을 모르고, 공무원·전문가는 침묵하고, 이들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생겨난 현상이 바로 미네르바 신드롬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미네르바 신드롬이야말로 위기에 취약한 한국의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단적인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네르바는 없다 

 이제 미네르바는 없다. 이제 우리는 미네르바 대신 다른 미네르바'들'이 필요하다. 익명이  아닌 실명의 미네르바'들'이 공적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때 바로 시민은 미네르바 대신 정부, 언론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당당히 자신의 실명을 밝히는 미네르바'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미네르바, 나도 한마디?
 
 
위의 주제에 대해 http://twar.co.kr와 다음아고라에서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 필명은 대통령입니다.

http://cyworld.com/ganapsany

미네르바와, MB식 민주주의

 미네르바의 예측글은 경제보고서를 꽤 읽었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입이 떡 벌어질만큼 수준이 높습니다. 금융회사의 전문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매우 쉬운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성하면서 주제의식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한마디로 ‘1급의 경제분석 보고서’인 셈이죠.


 그런 고급 두뇌도 대한민국에서 스스로 모습을 감추어야만 하는게 현실인가 봅니다. 금융권에서 현재 그만큼의 예측력과 분석력을 보인 애널리스트는 찾기 힘듭니다. 미네르바 외에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는 8월의 환율위기를 예측하지 못했고, 리먼 브라더스의 부실을 예측하지 못했으니까요.

 1997년 대한민국에는 주가가 300을 깨고 내려갈 것이라고 예측한 애널리스트가 있었습니다. 쌍용증권 이사로 근무하던 그의 이름은 ‘스티브 마빈’이었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문구와 온갖 자극적인 표현으로 한국경제의 몰락을 예고했던 그였지만, 당시 정부가 그에게 ‘해꼬지’를 할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10년전보다 더욱 퇴보한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네요..

 이처럼 ‘표현의 자유’가 농락당하는 시간에 주가를 드높이는 기본권이 있습니다. 바로 “사생활의 자유”죠.

 무려 5만명의 공직자가 ‘쌀직불금을 수령했다’고 자진신고하고, 여당의 원내대표는 ‘엄정한 법적 처단’을 약속한 바 있지만, 현재까지 쌀직불금 수령자로 알려진 사람은 이봉화 전 보건복지가족부 차관 단 한명 뿐입니다.

 그 외에 모든 직불금 수령 공직자는 ‘사생활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 명단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고 있다. 참여정부의 ‘쌀직불금 은폐의혹’을 수사해야 한다는 정부여당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더욱 강력하게 ‘직불금 명단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생활의 자유 때문이죠.

 농업을 겸업하면서 쌀직불금을 정당하게 수령한 인물이 몇 명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공직자로서 부당하게 직불금을 수령하여 세금을 횡령한 파렴치범이 몇 명인지도 알 수 없구요. 바로 ‘사생활의 자유’ 때문입니다.

 정체를 알지 못하던 고구마 파는 늙은이 ‘미네르바’는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아 신변이 공개되고 형사처벌 운운하는 위협을 들어야 하는 한편, 쌀직불금을 부당하게 타먹은 국회의원 이하 공직자들은 ‘사생활의 자유’ 아래에서 아무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MB식 민주주의입니까?

혹시 이와 관련해서 더 얘기를 나누고 싶으시면 http://twar.co.kr로 오세요.
제 티워 닉네임은 대통령입니다^- ^*

한일 해저터널, 뚫어? 말어?

 


 한일 해저터널은 총길이 209.8㎞, 최대수심 192m, 전체공사비는 약 11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며,토론자로 나선 일한터널연구회 후지하시 겐지 상임이사 역시 건설비용은 10조엔, 공사기간은 최근 터널기술 발전을 고려할 때 약 10년 내외로 추정된다며 적극추진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 통일원 장관인 허문도씨는 "한일 해저터널이 동아시아 경제를 이끄는 대동맥의 인프라이며, 완성되면 동아시아의 지역통합의 문을 여는 것이라 평가를 했으며, 성장세로 볼 때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능가하는 공동체로 발전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도 덧붙여 “한일터널은 양국 국민 간 신뢰관계 구축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이전에 마음의 문제이고 역사·문화의 문제”라며, 최대 난제는 한국민의 정서임을 지적했다고 합니다.

 


한일 해저 터널(출처: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일제시대의 해저 터널 구상

일제시대일본에 의한 터널 계획은 일본규슈에서 출발하여 한반도를 통과하는 동아시아 종단 철도로서 구상되었으며, 1930년대에 세워진 '동아시아 종단철도'에 대한 구상이 시작이다. 이것은 당시 일본 지배하에 있던 한반도부산을 기점으로 하여, 경성(현재 서울)을 지나, 안동(현 중국 단둥)에서 당시 만주국 영토로 진입, 선양을 지나 중국 영토에서 베이징, 난징 등을 경유하여 베트남의 하노이, 사이공, 프놈펜, 말레이 반도 까지 이어지는 약 10,000km의 노선으로 구상되었다.
또한 1940년대도쿄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탄환열차 계획이 세워진 이후, 1942년에 동아시아 교통학회가 설립되고 일본에서 쓰시마 섬을 거쳐 부산과 연결되는 해저 터널을 건설하여 위에서 설명한 동아시아 종단철도와 연결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에서의 기점은 시모노세키, 하카타, 카라츠 등이 유력하게 검토되었지만, 확정된 사항은 없다.
이 같은 계획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함으로서 좌절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구상

1980년대 부터, 한국에서 한일 해저 터널(일본에서는 '일한터널'이라 부른다)을 개통하고자 하는 의견이 일부 단체에서 제시되었다. 그 이후에 일본에서도 시민 단체 등이 한일 해저터널 추진 단체를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경로는 일제시대의 해저 터널과 비슷한 노선으로, 사가 현에서 쓰시마 섬을 지나 부산 또는 거제도를 연결하는 구상이 세워져 있다. 이 구상은 자동차 도로와 철도를 같이 건설하는 것을 전제로한다. 공법에 있어서는 해저 지층을 뚫는 방법과 콘크리트로 만든 케이슨(Caisson)을 일정한 해저 심도에 늘어놓아서 구성하는 '해중 터널' 방식이 제안되었다.
또한 한일 양국 정부 모두 현재는 한일 해저 터널은 "앞으로의 계획"이라고만 언급하는 정도이고, 본격적인 착공을 위한 계획은 없다.

 찬성과 반대
찬성하는 쪽은 한일간의 우호 증진이나, 또는 철도가 한반도를 경유하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 각지를 통과하는 물류 허브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추진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반대하는 쪽은 항공편을 이용한 수송이 주류인 이 시대에 큰 예산을 들여서까지 이런 터널을 건설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육상을 통한 대륙 진출을 꿈꾸는 일본에게만 좋은 일을 해 주는 꼴이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 또한 있으며, 국방에 관계된 문제와 무역관세 등의 문제가 주요한 반대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동북아 물류중심지, 유라시아 철도건설을 표방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한일 해저 터널을 설치하면 한국은 간이역이 된다는 주장이 절대적이다.

이에 대한 토론이 http://www.twar.co.kr 에서 진행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