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0일 금요일

[속보]군포 연쇄살인범, 실종 7명 살해 자백!



 결국 군포 연쇄살인범이 실종됐던 7명을 모두 살해했다고 자백했다고 하네요.
범행동기는 2005년 전처 사망 이후 1년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고 여자들만 보면 살인충동을 느껴서 였다고 합니다.
양파처럼 까도 까도 또 나오는 그의 범행....
아직 덜 밝혀진 것이 있을까봐 걱정이 됩니다.

아래는 실종 부녀자 7명의 살해 일자와 암매장 장소입니다.(연합뉴스 인용)

▲노래방도우미 배모(당시 45세)씨 : 2006년 12월 14일 군포시 산본동. 화성시 비봉면 비봉IC 부근 야산.

▲노래방도우미 박모(당시 37세)씨 : 2006년 12월 24일 수원시 장안구 화서동. 안산시 사사동 야산.

▲회사원 박모(당시 52세)씨 : 2007년 1월 3일 화성시 신남동. 화성시 삼화리 야산.

▲노래방도우미 김모(당시 37세) : 2007년 1월 6일 안양시 안양동. 화성시 마도면 고모리 공터

▲여대생 연모(당시 20세) : 2007년 1월 7일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금곡동 인근 천변

▲주부 김모(48)씨 : 2008년 11월 9일 수원시 권선구 당수동. 안산시 성포동 야산

▲여대생 A(21)씨 : 2008년 12월 19일 군포시 대야미동. 화성시 매송면 원리 논두렁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1월 29일 목요일

군포 여대생 사건, 끝없이 밝혀지는 진실


군포 여대생 사건, 정말 끝이 없네요. 

속속들이 밝혀 지는 여죄들의 가능성에 사회 전체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1. 증거를 감추기 위해 피해자의 손톱까지 잘랐습니다.
그런데 왜 본인 컴퓨터를 포맷 해서 자신이 범인임을 보여 주었을까요?

 
증거를 감추기 위해 피해자의 손톱을 잘라 버린 점,
ATM 지문을 가리기 위해 콘돔을 사용 했다는 점,
본 사건을 4시간만에 모두 끝냈다는 점 등을 생각한다면
개인적으로 유영철보다 지능범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본인 컴퓨터를 포맷해서, 검찰의 의심을 샀을까요?
범인은 자기가 용의선상에 오른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컴퓨터를 포맷했습니다.
무리하게 포맷을 한 것을 보면, 다른 더 중요한
자료를 삭제하기 위해 포맷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갑니다.
검색어 수사 발표 후 그 압박으로 포맷을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혹시 다른 사건의 증거를 지우기 위해 포맷을 한 것이 아닐까요?

 2. 왜 자신의 무쏘 차량을 태웠을까요?

 피의자는 자신의 무쏘 차량을 태웠습니다.
왜 일까요? 다른 범행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한 것이 아닐까요?
경찰에 의하면 범인은 범행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라고 진술 했다고 하지만,
이번 사건에 쓰인 차량은 어머니의 차량인 에쿠스입니다.
범인으로 잡힐지도 모른다는 다급한 상황에서 갑자기 차량을 태울 이유는
없다고 생각 됩니다. 오히려, 다른 범행에서의 흔적을 지위기
위해 태웠다 라는 설 쪽에 더 믿음이 갑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추가 범죄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이 갑니다.

 (1) 추가 범죄가 의심 됩니다. 

 매일경제에 의하면,
부녀자 연쇄 실종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의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범인의 축사는 4㎞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축사의 트럭에서 여성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 라고 범인은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의 정황들을 정리해 보면 여죄의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쩌면 이 사건은 유영철을 뛰어 넘는 역사에 남을 만한
연쇄살인 사건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당시 사건 기록을 재수사하고 있다"
수사본부의 관계자의 말입니다.

 (2) 그의 가족의 죽음은 우연이었을까요?

 그는 결혼을 네 번 했는데, 넷 째 부인과 그 장모는 화재로 사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용의자는 네번째 부인이 화재로 사망하기 5일 전 혼인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또한, 넷째 부인이 피보험자로 4억 가량의 보험이 가입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rm래서 범인은 부인이 죽은 후 4억원 가량의 보험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우연치고는 너무 무서운 타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용의자와 그의 아들(첫째부인 아들)은 무사 했다고 합니다.

모두 계획된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09년 1월 22일 목요일

YTN 용산 참사 미공개 영상 그리고 미공개 사실들



 
36초부터, 망루 안에 갇힌 철거민들의 비명소리가…

시너가 엎어진 경위

물대포로 진압 → 철거민들이 망루에 들어가 물대포 피함 →  망루에 물참  → 철거민 망루안에서 매달림  →

→경찰 크레인 이용 컨테이너 박스로 특공대 투입 → 컨테이너박스 망루 누르고 밀음  →  신나 엎어짐  →  폭발

 
3층은 용역깡패들과 경찰들로 막아놓고 피하지도 못하게하고 망루안에 사람과 시너, 화염병들 있는거 다 알고 있으면서 밀어붙여 유류성물질에 불이 붙어서 화재가 발생하자 살수.

 시너 등 인화물질에 불이 붙었을 때는 물이 아닌 특수용액을 뿌려야 합니다. 
시너는 물보다 가벼워 물 위에 뜨기 때문입니다.

 살수는 오히려 불을 크게 만든거랍니다.

 
소방차도 없이, 시너에 대한 정보 준비도 없이
무작정 병력 우겨넣다가 이런 대참사를 일으켰네요.

 이건 명백한 타살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길을 피해 뛰어내린 철거민이 건물 난간에 매달리자 구조는 커녕 살수, 추락시키고 추락한 철거민을 기다렸다는 듯이 침낭으로 덮어버리고 그대로 시신을 십여분 방치했습니다.

동절기에 철거하는 것은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이 나라 정부는 자기네들 법도 상관없는 모양입니다.

웹서핑 도중 돌아다니다가 이러한 내용을 보고 정말 분노를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2009년, 21세기가 정말 맞습니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http://www.twar.co.kr/tbattle/view.php?a_id=16621&tag=1&list_type=1
이 곳에서 위 사건과 관련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참가하시거나 토론 결과를 보고 싶으시면 위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동방신기의 주한미군 발언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


그룹 동방신기의 멤버 영웅재중의 주한미군 관련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영웅재중은 남성지 'GQ' 2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신문 읽는거 좋아한다. 특히 중앙일보 팬이다. 종이 질도 맘에 들고 글씨도 눈에 잘 들어온다"고 밝히는 도중에 '주한미군' 관련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영웅재중은 이어 기억의 남는 기사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아파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단 얘기가 돌 때였는데 신문에 주한미군에 관한 기사가 났었다"며 "그전까지 미군 기지가 한국에 있는 것이 싫었는데 놀랍게도 그 날은 기사를 읽으면서 주한미군에게 조금 의지가 됐다. 전쟁 나면 우리 편일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이같은 영웅재중의 인터뷰에 네티즌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요 주한미군을 현실적인 부분에서 인정하는 솔직한 발언이라는 지지글과 함께 좀더 신중하게 발언을 했어야 했다는 비판의 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논란거리가 생기면 Twar(
http://twar.co.kr)에서 여론을 듣습니다. 물론 Twar의 여론이 우리 국민 모두의 여론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교적 편향되지 않은 사이트라고 생각하거든요. 오늘도 싸이월드 뉴스에서 위 소식을 접하고 바로 Twar를 찾았습니다.

Twar에서는 문제있다와 문제될 것 없다로 나뉘어져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문제 없다!는 의견

대통령님:
연예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말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사에서도 보니까 예전엔 싫었지만 현재상황으로볼때에 주한미군이 "조금 "의지가 된다고 말한것 아닌가? 주한미군이 아예좋다고 옹호하고 나선것도 아닌데 자신의 생각으로 의지가 좀 된다고 말한거 가지고 실언을 했네 어쨋네 하는건 좀 우습다고 생각한다.이런거 가지고 공식해명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솔직히 우습다. 그냥 자기 생각을 말한거고 군사력이나 북한을 따져볼때 조금 의지가 되었다는 건데 미군이 있으면 북한이 함부로 건들순 없으니까 전쟁에 있어서 지원군이 있다는 사실에 의지가 되었다는건데 왜 동방신이의 멤버가 말을했다는 이유로 난리들인지 모르겠다 . 분명히 그들이 일순위로 꼽는 영향력이 있는 가수이고 많은 팬들이 있지만 분명 ,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어갈테고 게다가 이 발언의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모르겠다. 너무 곡해해서 해석하는게 아닌가 다들, 그저 조금 우리나라의 병력말고도 미군의 지원과 북한이 미군의 눈치를보며 실상으로 건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조금 의지가 된다고 얘기한거 가지고,벌떼들처럼 달려들어서 편협한 편견으로 한사람의 발언을 입막음 하려는건 아닌가.연예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말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사에서도 보니까 예전엔 싫었지만 현재상황으로볼때에 주한미군이 "조금 "의지가 된다고 말한것 아닌가? 주한미군이 아예좋다고 옹호하고 나선것도 아닌데 자신의 생각으로 의지가 좀 된다고 말한거 가지고 실언을 했네 어쨋네 하는건 좀 우습다고 생각한다.이런거 가지고 공식해명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솔직히 우습다. 그냥 자기 생각을 말한거고 군사력이나 북한을 따져볼때 조금 의지가 되었다는 건데 미군이 있으면 북한이 함부로 건들순 없으니까 전쟁에 있어서 지원군이 있다는 사실에 의지가 되었다는건데 왜 동방신이의 멤버가 말을했다는 이유로 난리들인지 모르겠다 . 분명히 그들이 일순위로 꼽는 영향력이 있는 가수이고 많은 팬들이 있지만 분명 ,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어갈테고 게다가 이 발언의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모르겠다. 너무 곡해해서 해석하는게 아닌가 다들, 그저 조금 우리나라의 병력말고도 미군의 지원과 북한이 미군의 눈치를보며 실상으로 건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조금 의지가 된다고 얘기한거 가지고,벌떼들처럼 달려들어서 편협한 편견으로 한사람의 발언을 입막음 하려는건 아닌가.

IMMuE님: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을 말한것이니 문제 될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적인 수준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전시에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미국이고, 전시에 우리를 도와주는 것도 미국입니다. 동맹국이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아직 휴전상태인 우리나라에 있는것이고요.
때문에 주한미군이 있기에 안심할 수있다고 말한것 같습니다. 최소한 강력한 동맹국이 1나정도는 있다는것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미감정이 너무 팽배했기때문에 이런식으로 이슈화 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문제될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 있다! 는 의견

전의원:
ㅋㅋㅋ 주한미군 없으면 우리나라가 쓰러진다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들 우리나라 육군이 세계 3위인건 알고있으신가요?^^ 특히 전차력은 거의 세계 탑입니다 ㅋㅋ 무시하지마세요 물론 핵과 장사장포로 무장하고 있는 북한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주한미군 없으면 바로 무너진다는 건 좀....


대체로 크게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하신 분들은 그 수도 적었고 논거도 매우 빈약했습니다.
참고로 저의 닉네임은 대통령입니다.




2009년 1월 21일 수요일

용산 참사, 국민들의 생각은?


용산 참사는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한강로 2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하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과 경찰, 경찰특공대, 용역 직원들 사이의 충돌 중에 벌어진 화재 참사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다쳤습니다.



국민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비교적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은 토론사이트 Twar(http://twar.co.kr)에 접속했습니다.

이번 진압은 불가피했다!
one님
화염병이 있었다는 것이 크지 않았을까요...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서... 화염병은 나이에 관계없이 쓸 수 있는 무기니까요... 이런 사건 보면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댓글이나 신문들을 계속 보다보면 너무 한쪽으로 편중된 느낌이 드니까요...

전의원님
돌아가신분들은 안됐지만..저걸보고 자업자득이라하지요

이번 진압은 과잉 진압이었다!

돌고래님
공권력이 사람5명을 죽였는데 지들 경찰 1명 죽었다고 신문기사에 한면을 할애하며 애도하고 미화하고 나머지는 악당 만들고 물타기 정말 최고다. 조중동은 관련기사 조차 제대로 내보내지 않고... 이래도 알바들은 물타기 양심없는 댓글이나 올리고 있고 촛불집회? 아니다. 이제는 민주시위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물대포를 쏴대고 무조건 잡아가고 되먹지도 않은 법을 적용해서 인터넷 글조차 감시하는 이런 상황이 진짜 슬프다. 유가족에게는 애도를 표하지만 불법시위에 대해선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는 한총리의 경찰이 ABC단계도 지키지 않은 시위진압은 합법이고 그것에 항의하는것이 불법이라는 개같은 논리는 니가 썩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다. 진짜 아까도 봤는데 잘했다 시위하는 놈들은 총으로 쏴버려야한다고 댓글단 알바놈들 찾아서 다 죽여버리고 싶다. 진짜... 알바놈들아 적어도 인간의 도리는 지켜라. 친일파 앞잡이들 꼬봉짓에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대통령님
철거민들 대부분이 6,70대의 노인분들이셨고 가장 젊으신 분의 연세가 '50세' 였습니다. 이 추운 날에 차가운 물까지 뿌려가면서 말그대로 몰상식하게 진압하는 이 작태가 정말 분노스럽고 눈물납니다. 경찰은 진압과 폭발이후,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방패로 가리고 이송했고, 가족들에게 생사를 확인조차 하지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 유가족들의 확인이나 승인 없이, 시신을 마음대로 부검해버리는 상식밖의 짓거리를 저질렀습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 돈 천만원 줄테니까 땅내놓고 나가라고 하고, 거기에 항의하는 5-70대 분들을 이 추위에 물대포를 뿌리고, 테러진압을 목적으로 하는 특공대까지 투입해서 무식한 작태를 부린 결과 이런 참사가 빚어졌습니다. 이게 2009년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사건 이후 분노한 시민들이 규탄 집회를 나섰고, 경찰은 또 이 겨울 저녁에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투석전을 벌여 경찰과 달리 헬멧이나 방패등 전혀 무장하지 않은 시민 몇 명의 머리와 눈에 돌을 맞아 찢기고 피를 흘리고, 또 방패로 가격하고 사람이 타고있는, 방송을 틀어놓은 차의 유리를 깨부수고 차를 뒤흔들고 밀었고, 그 와중에 여성 두분이 전경들의 아래에 깔려서 크게 다칠뻔한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시지만 바로 며칠 사이 저녁과 새벽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이런 무능하고 대책없고 무자비한 정부를 언제까지 봐야하는걸까요? 총리라는 인간은 이런 참극이 빚어졌는데도 불구하고 '4대강정비사업(대운하)' 좀 잘 봐달라며 기어가서 윗사람 똥꼬나 핥아주고있습니다. 이게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미네르바님
어제 어떤 사람들이 그러드라...보상금 2억..3억받고도 저런다고..폭력시위니..저래도 싸다고..당신들눈에는 55세의 돈없어 미안하다는 한가정의 가장이자 세입자가.. 세를 얻어 호프집을 운영해온 70세의 이모씨와 그 아들이 강제 폭도로만 보이는가..내 눈엔 당신들이 말하는 좌빨의 기운인지 뭐시긴지가 끼었는지..몰라도 그들의 슬픔이 마음아프기만 하다.. 한 가정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식구들을 위해..전쟁터의 군인보다 더 용감해지는 법이다..그들에게 가정은 그리고 식구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니까..내가 용기가 없어 저들처럼..또는 시위는 못하겠다..허나..2MB 그리고 딴나라당..그리고..그 보수신문들..그 행태..기필코 내 기억에서 평생 지우지 않겠다.

볼매님
도무지 이해가 안되네요..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는건데..이게.. 시간을 다투는..경찰이.. 무리하게 진압해서.. 해결해야할 사안인가요?? 그들이 인질납치범인가요?? 경찰은 왜 이렇게 무리하게.... 특공대를 진압에 투입시킨 이유를 알고싶네요.. 이건 개인재산권에 관한 흔히 있는 문제인데.. 왜 이토록.... 시급하게 처리를 할문제인지.. 궁금하지않을수없네요... 이게 경찰이 밤샘대치할정도로..국가안위에 시급한 사안인가요? 이게 시국사건도 아니고...인질납치사건도 아니고..도무지.. 단지 개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경찰이 강제해산에.. 나선다? 이미 시위자들이 분노한 상황에서 굳이 특공대경찰을 투입시킨 의도가 뭔가요? 전 도무지이해불가이네요.. 아침에..사람이 5명죽었다길래..좀..이건 아니다 싶네요... 이건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개인들의 재산권과 생존권문제인데.. 경찰특공대라..좀.. 이해불가입니다.. 그들이 화사랑해을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무작위투척한것도 아니고 경찰이 진입하려해서 자위용으로 던진거 아닌가요?? 그런 위험한 상황이면..대화로 풀어야지.. 살수차동원한..진압이라.. 경찰특공대 투입이라.. 이건좀..아니지요

용산참사, 어떤 사건인가?

용산참사는 어떤 사건인가?

용산 참사는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한강로 2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하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과 경찰, 경찰특공대, 용역 직원들 사이의 충돌 중에 벌어진 화재 참사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다쳤습니다.


사건개요

2009년 1월 19일 오전 5시 30분 용산 4구역 철거민 대책위원회 회원 30여 명이 서울특별시 한강로 2가에 위치한 5층짜리 건물 옥상을 점거하였습니다. 경찰은 경비 병력으로 3개 중대 300여명을 투입하였구요. 철거민들은 옥상 건물 위에 망루(望樓)를 짓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철거반에 저항하였고.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맞썼습니다.  철거민들은 서울시가 최소한의 보상도 없이 철거를 밀어붙이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월 20일 오전 1시 22분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농성장 옆 상가 건물 가림막에 화재가 나 40분만에 진화되었습니다. 오전 6시 12분에 경찰은 철거민들에게 물대포 살수를 시작하였습니다. 6시 45분 경찰은 건물의 옥상에서 농성하던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옥상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7시 컨테이너가 옥상으로 올라가자 본격적인 직압이 시작되었습니다. 7시 20분에 특공대를 실은 두 번째 크래인이 올라가자 3층과 4층에서 불이 났고 옥상에 있던 망루에도 불길이 번졌습니다. 7시 30분에서 40분 시이 4층에서 3명이 불을 피해 창문가로 이동했으며 1명이 난간에서 떨어졌습니다. 7시 45분에 불이 붙은 망루가 무너졌습니다. 8시 30분에 소방관들이 옥상에 올라가 망루를 해채하였습니다. 11시 45분 경찰은 망루를 수색하여 사망자 5명(경찰특공대 대원 1명)을 발견했으며, 23명(경찰 17명, 농성자 6명) 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12시 20분 시신 1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배경

도시정비사업

서울시는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용산4구역 재개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용산4구역 재개발 사업은 한강로3가 63∼70번지 일대 5만3442㎡를 도시환경정비 차원에서 재개발하는 사업입니다. 이 사업으로 40층 규모 주상복합 아파트 6개동(493가구, 평형은 164∼312㎡)이 들어서게 됩니다. 상인들은 재개발로 인해 주변 땅값이 많이 올라 장사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도시정비사업 관련 법률은 도시개발법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 토지보상법 등으로 복잡합니다. 복잡한 법 체계의 틈으로 공공연한 불법행위가 저질러졌습니다. 서울시와 자치구들은 토지보상법에 규정된 주거이전비를 철거지역 세입자들에게 지급하지 않아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보상비 갈등

인명 참사로 이어진 서울 용산 재개발 철거민들의 건물옥상 농성은 철거민과 조합 간 보상비 갈등이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서울시와 용산구에 따르면 재개발조합 측은 세입자에게 법적으로 규정된 휴업보상비 3개월분과 주거이전비 4개월분을 지급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일부 세입자는 조합이 주는 보상비로는 생계와 주거를 이어갈 수 없다는 입장이구요. 상가 세입자들은 "지금껏 충분하지는 않지만 먹고살 만했는데, 조합이 주는 보상비는 턱없이 적다"며 "철거하면 당장 생계를 이을 수 없으니 대체 상가를 마련하는 등 대책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건 발생 전에 세입자 890명 중 85.7%(763명)의 보상은 완료됐습니다. 철거도 80%가량 이뤄졌으나 일부 상인과 주거 세입자 중 100여명이 2007년부터 보상비에 반발해 시위해 왔습니다

자료참조:위키피디아


2009년 1월 20일 화요일

원조 한국판 F4, 기억나세요?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꽃보다 남자'
대만판, 일본판에 이어 한국판 '꽃보다 남자'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만화책을 그대로 갖다 놓은 것만 같은(만화를 본적은 없지만ㅋㅋ) 
완벽한 F4와 금잔디!


외모면 외모 연기면 연기, 모두를 '꽃보다 남자'의 팬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모두들 원조 F4를 잊으셨다는 말입니까?

한국판 꽃보다 남자, 아니 한국판 F4는 사실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개콘의 F4입니다!

좀 오래돼긴 했지만 다들 기억하실겁니다.

오지헌, 정형돈, 정종철, 김시덕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민이라고 해~"

훈남, 꽃남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자아도취에 빠지는 개그ㅎ

 

사실 개콘의 독설가 왕비호가 위와 같이 말하더라구요ㅋㅋ

저는 왕비호 말에 공감합니다ㅋㅋ

여러분도 공감하신다면 추천 꾹!

2009년 1월 19일 월요일

광복에서 한반도 전쟁, 그리고 이명박 당선까지


1. 들어가며


 한반도의 일제치하에서의 상황부터 6.25 발발까지의 상황을 다룰 것이며, 이러한 상황들을 국제정치학적 관점으로 살펴보며, 한반도의 국내적인 상황보다는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국제정치학적 지리를 주되게 다룰 것이다.

 한반도의 시대적 상황들로 보아 그 시기 한반도의 주된 영향을 끼치고, 흐름을 잡아나갔던 국가들은 미국과 소련이라고 판단된다.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국가가 이 두 국가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한반도 문제를 다루었던 전시회담의 성격과  더불어 그들의 입장, 그리고 해방후의 그 두 국가의 입장의 변화추이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또한 한반도 분단에 있어서 그들이 어떠한 역할들을 하였으며, 그들의 입장 변화에는 어떠한 요소들이 놓여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 전시회담 

 미소 연합국은 두 경쟁적 사회 체제의 약점을 해결하고 전후에 분출할 혁명적인 사회 변화의 통제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회담을 진행시켰다.  그러므로 전시회담에 임하는 국가들의 이해과 그에 대한 관철, 그리고 그들의 입장은 향후 세계질서재편과 밀접히 연관되어져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전후 처리 방안에 대해 연합국간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43년 11월 ‘카이로 회담’부터 이다. 이후에 테헤란 회담, 45년 2월 얄타회담  그리고 포츠담 회담 등을 걸쳐 한반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시회담의 두드러진 특징은 ‘국제주의’적 정책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제주의적 대회 정책의 핵심고리는 전면적인 문호 개방 정책의 추구하에 형성된 국제 협정에서 미국의 지배적인 위치를 전제, 폐쇄적이고 직접적이기 보다는 개방적이고 간접적인 접근 방색을 통하여 이해를 관철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입장도 직접적인 반공이라기 보다는 견제의 측면으로 주도하려고 하였던 것이며, 전후 식민지에 대한 처리 방시도 혁명과 전쟁을 방지하는 체제 통합 구상을 전제로 기존의 단독 식민 통치에서 다국 신탁 통치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합국의 국제외교의 변화는 미국의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미국경제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불가결한 세계적 외연으로 포섭하여야 하고, 동시에 세계적 차원의 계급 대항에 대응하여 미국을 본영으로 하는 경제․정치․군사적 통일체로서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존립 요건을 보장해야만 했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세계 정책은 반공, 반혁명을 그 핵으로 하는 세계 전략 체제의 총괄로서 통일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또한 수많은 식민지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던 반제 반파시즘 운동과 전시중이라는 상황이 고려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3. 세계 2차대전의 종결과 미소의 정세․전략 

 세계 2차대전의 종결후의 국제정세는 간단하게 말해서 세계질서의 재편기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으로의 양분화와 함께 그 사이의 광범한 식민지․반식미지의 존재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체제모순이 주요 모순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반도와 같은 경우 이와 같은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나타나는 제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작용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계질서 재편기의 국제정세에 대한 고찰이 해방후부터 한국전쟁 발발까지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라 할 수 있겠다.

 1) 미국의 세계전략 

 미국의 세계전략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미국의 국내정세를 더불어 알아야 하겠다. 미국은 세계 2차대전을 통해 경제적 발전을 향유, 이에 기반하여 종전 직후에는 비교적 유화적인 국제주의적 대회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국제주의 시기를 경과하면서 미국은 종전 후 급속한 동원 해제와 전쟁경제 해체과정에서 ①국내 독점자본의 생산기반이 위기에 봉착하고, ②국내 노동계급 등의 계급운동의 광범한 확산으로 점차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국내적 상황과 맞물려 대외적으로는 구식민지체제의 붕괴와 전세계적수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고양, 그리고 동구를 중심으로한 13개국의 자본주의 진영 이탈과 사회주의권으로의 편입으로 인하여 미국 독점자본은 상품시장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국내․국외 정세와 맞물려 미국은 더욱 공세적인 사회주의권 고립정책과 식민지․반식미지 민족해방운동 억압(그리스-필리핀 민족해방운동의 폭력적 억압), 독일․일본에서의 역전정책 및 이의 미국 헤게모니체제로의 편입 등을 추구하였다. 이로보아 미국은 대외적으로 사실상 제국주의적 지배전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소련의 세계 전략 

 이 시기 소련은 세계질서 재편에 있어서 미국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주체였다. 1945년 세계대전 종전의 시점에서 볼 때 소련은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미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열세에 있었다. 대전 당시 유럽에서의 주대립전선은 독소전선이었으며, 이 힘겨운 전쟁에서 미국이 전쟁기간 중 세게의 공장으로서 등장하는 동안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많은 인적․물적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종전시 소련은 일국수준에서의 최소한의 사회주의체제의 유지조차도 용이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종전 후 소련에게는 국내경제의 복구와 체제유지가 가장 긴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2차대전 후 한국전쟁 종결시까지 소련이 과도할 정도로 일관되게 견지한 수세적․대미유화적 국제협력노선과 국내적 억압통치는 경제와 정치․군사의 두 수준 모두에서 미국에 비해 엄청나게 열세에 놓여있다는 객관적 조건 아래 강화되는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공세에 대응하여 일국수준에서의 사회주의체제라도 보전하려는 고육지책의 결과로 이해된다. 스탈린주의의 대내외적 편향성이 초해한 결과는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무지원과 제국주의와의 편향된 타협노선 그리고 대내적인 엄청난 강권통치노선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것은 지역적으로 심한 차별성을 띠며 관철되었는데 유럽의 동구지역에 대한 상대적 중시에 비하여 유럽의 동구이외의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예컨대 한국등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대미타협과 무지원으로 일관, 이러한 소련의 유화적 노선이 관철된 대표적인 사레였다. 소련이 미국으 분할 점령안에 수동적으로 동의한 것은 한반도에서의 미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대신 일본 점령에 개입할 기회를 추구하고 만주에서의 이권을 확보하며 동유럽지역의 소련군 진주를 공고화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4. 미소의 대한정책 

 위에서 보여지는 미소의 국내․국제 정세속에서 연합국의 세계전략을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소의 세계전략은 한반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났을 것인가.

  1) 미국의 대한정책 

 2차대전 직후 미국의 동북아정책의 핵심은 변혁을 추구하고 있던 동북아를 미국의 이해에 맞게 세계자본주의권내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이러한 정책을 관철하는 데에는 몇 가지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다. 첫째, 한반도에 소련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한반도가 소련의 세계질서재편의 범위에 편입된다면 이 지역은 제 2의 동구가 될 가능성이 많았다. 독일 패망후의 동구권에서의 움직임은 미국에게는 자본주의권의 축소와 시장경제의 축소를 의미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이 동북아에서는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또하나의 미국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장애는 중국내전이 친미적인 국민당정부에게 점점 불리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한정책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대동북아정책의 기조위에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한반도가 소련과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지정학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한반도는 군사적으로 더욱 중요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한반도에 있어서 반공친미국가를 한반도에 구축하는 것이 미국의 대한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를 기본적으로 축으로 하여 대한정책이 수립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한 미국의 한 관리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의 핵심은 한반도가 소련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의 독립이 제2차 목표이므로 금후 수년내에 완전한 독립을 하게 될 한국 정부의 구성이 미국의 이익에 맞는 것으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유엔 기구의 침략을 방지할 수 있는 능력의 합리적인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때까지 미국은 필요하다면 소련과 더불어 한국의 영토를 보전하며 한국의 국제관계에서 어떤 긴요한 특권을 행사하여야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한국 임시정부의 구성도 미국이 상당한 기간동안 적어도 최고위 수준에 있어서 어떤 형태와 위장된 지배권을 행사한다는 전제조건에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정책에 기초하여 38선 이남을 점령, 군정을 실시하고 직접통치하기에 이르렀다.

 2) 소련의 대한정책 

  전후 식민지 처리에 대한 소련의 입장은 1920~30년대 스탈린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외 정책의 이론적 근거로부터 연원한다.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속에서 ‘일국 사회주의론’으로 확립되면서 대 자본주의의 진영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일련의 자기 정리가 이루어졌다.

 이는 혁명 직후 불리한 국제 정치적 상황에서 소련의 안보를 확보하고 국력 강화를 위한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과제는 세게 혁명의 기지로서 소련 방위라는 임무가 국제 공산주의 운동 세력에 부과되었다. 그 결과 소련은 미국과의 유화정책을 택하게 되었고, 이는 한국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더더구나 군사 작전에서도 부차적이었던 한국 문제에 대해 독자점령의 구상보다는 미국의 신탁 통치 논의에서 몇 가지 확인 정도를 거치며 협조에 응했다. 결국 소련은 국경 주변의 완충 지대 형성이라는 정책 실현을 위해 한반도에서 비우호적 정부의 형성을 방지하려는 수준에서 머물렀을 뿐, 한반도 자체를 주전략 지역하하지는 않았다.

 5. 한국 전쟁의 발발 

  한국 전쟁의 발발원인으로 가장 크게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은 국내적 원인과 국제적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기간의 미소의 대한정책에 있어서 한국전쟁 발발 원인을 찾아보고자 함이며, 또다른 하나는 이러한 국제정세와 맞물려서 국내적인 상황에서 돌아보고자 함이다.

 한국 전쟁의 발발의 원인중 가장 큰 역할을 해던 것은 미국의 이중적인 대극동-대한반도 정책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또다른 원인으로는 일제치하 후의 피폐한 상황과 이승만 정권의 한계와 위기를 꼽고 싶다. 

  한국전쟁의 발발까지의 미소의 대한정책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중국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혁명은 그간 부차적인 존재로 머물러있던 한국이라는 존재를 표면위로 부상시키게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이 어떠한 위치였으며, 중국혁명이 미소정책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는지 살펴보자.

 중국혁명 이전에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이 큰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의 국민당은 미국이 친미적정부를 만들기 위해 지원을 하고 있었던 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중국에서는 공산화가 되었고, 미국이 중국 공산당내에서 벌였던 모든 공작 또한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혁명이 시사하는 바는 미국에게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줄 한반도라는 나라 역시 공산화의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이며, 중국에서의 실패는 미국에게 ‘제 2의 중국’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결의를 갖게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여기에서 아주 교묘하게 그들의 입장은 숨기고 난마하게 된다. 이 시기 미국은 중요한 이중적 외교자세를 보이는데, 그것은 즉 1948~50년 기간에 동아시아에서의 반혁명 정책을 한층 강화시켜가는 한편, 그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남한을 버린 것 같은 외교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미국은 중국혁명의 성공, 즉 미국의 국제전략의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중국혁명 당시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모습 속에서 스탈린 혹은 김일성에게 한반도와 같은 상황에서도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갖게된다.

 또한 소련은 중국혁명의 성공을 목도하게 되면서, 한반도와 같은 경우도 쉽게 소련의 세계재편의 질서의 범주하에 편입시킬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의 미끼를 덥썩 물은 소련과 북한은 한국전쟁의 발발원인이 될 수 있다 하겠다.  

 그 태동의 과정에서 많은 정치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현한 이승만 정권은 초기부터 숱한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노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정권의 정통성과 연결된 문제로써 하나는 사회 경제적인 수준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민족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사회 경제적인 수준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군정이 일제 시대의 모순과 착취구조를 거의 혁파하지 않은 데다가 이승만 정권이 이를 그대로 계승한 데서 연유한다. 이러한 문제점에다가 경제 상황 또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정부 수립 후 남한의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되고, 쌀값 또한 폭등하게 된다. 이같은 쌀값 폭등으로 도시와 농촌의 많은 사람들이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경제 원조가 중단된다면 그 즉시 붕괴될 상황에 놓여 있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위기로는 정권의 한계로 인하여 생겨난 남한 농민들과 군인들의 자기 체제에 대한 저항도 꼽을 수 있다. 일제 시대 이래의 토지 모순 구조의 온존과 그것의 개혁에 대한 기대의 무산, 물가의 폭등, 절대 빈곤과 기아, 친일파의 발호, 정부의 무능, 점점 줄어드는 통일 정부 수립의 가능성...등등이 남한 민중들의 인내를 한계롤 내몰아 가고 있었다. 이들의 저항 또한 이승만 정권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6. 나가며 

 이상이 전시회담부터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까지 살펴본 결과이다. 전반적으로 국제정세를 지배하는 것은 패권이며, 이러한 나라들의 패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 여직까지의 국제질서의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한반도의 문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는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되었으며,
2009년 오늘까지도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와 기록에 대한 정보는 국가기록원에서 더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2009년 1월 16일 금요일

실패를 통한 또다른 시작, 세계화

'세계화'

 

1993년 김영삼대통령을 수장으로 한 문민정부의 출범은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의 도입을 통한 세계화를 강조하며 새 시대를 개막했다. 이는 종전과 다르게 신자유주의적으로 한국을 개혁해 나가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전이자 국제정세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하나의 도약이었다. OECD 가입,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돌파, 월드컵유치, ASEM 유치 등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많은 성과를 거두며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는 듯 했다. 그러나 김영삼정부는 산업과 기업의 국제 경쟁력 약화와 환율의 고평가 상태를 지속하게 만들어 수출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고, 결국 집권 말기인 1996년 IMF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사태를 야기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세계화를 골자로 한 김영삼정부의 실패 원인을 학계에서는 장기적인 마스터플렌없이 급조된 정책과 일관성과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고있다.

하지만, 숱한 과정을 겪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화는 정권교체와 함께 정책의 핵심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세계화라는 시스템의 도입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계의 축을 따라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수적이고,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금의 세계화는 과거보다 다루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지난 실패를 통한 또다른 시작이며, 그만큼 더 이상의 실패가 없도록 하기위해 과거보다 더욱 철저한 준비과정을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먼저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세계화와 국제화의 차이를 명확히 알아야할 필요성이 있다. 이 두가지의 근본적인 차이는 본국의 개념을 지니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국제화란 모국을 기초로 하고있다. 기업경영의 예를 들면 삼성이 국제화 되었다고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삼성이 알려지더라도 삼성은 한국의 기업이라는 것을 중요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세계경영의 이익이 본국으로 회수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세계화는 모국의 개념이 희박한 것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몇해 전 한국을 방문한 IBM회장이 IBM코리아는 미국의 기업이 아닌 한국의 기업이라고 말 한 것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들었다. 이처럼 기업경영에서 더 이상 모국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삼성의 이익은 삼성이라는 기업의 것이지 한국산 삼성이라는 것이 더 이상 중요치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지금은 모두가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부른다. 이는 국경의 의미가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국제화 다음의 단계로 세계화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기업의 입장에서도 처음에는 세계로의 확장을 중요시하다가, 지금의 세계는 국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생산기지화, 시장으로 삼는 비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었던 세계화의 잘못된 개념은 점진적으로 변화되어야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세계화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우리가 선진국으로 발전해나가는데 중요한 초석으로써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세계화의 도입을 모두가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매스컴을 통해 세계화에 대항하는 무력시위나 반대시위를 많이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화 반대시위는 무역자체의 반대가 아니라 기업들의 무역협정 악용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세계화 반대의 중요쟁점은 불공평의 급속한 확대와 지구생명 보존체계의 붕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돈의 민주주의로 대체, 다양한 문화를 물질 중심의 탐욕의 문화로 획일화를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세계화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준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계 시장경제에서 기업세계화 정책은 진정한 부를 파괴하고 있다고 반대론자들은 주장한다. 다만 세계화로 인해 착취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제3세계 사람들이 인권은 무시된 채 그나마 굶어죽지는 않고 있지만, 기업이 노동기준을 강화한다면 일자리는 다시 선진국으로 이동하게되고 그들은 결국 굶어 죽게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반대론자들은 원시적인 승자 독식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으며 그로인해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말한다.

또다른 하나는 오염촉진을 들 수 있다. 국민의 소득이 늘어나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고, 후진국의 경우 환경은 그다지 가치있게 평가하지 않으므로 많이 훼손되더라도 조치를 잘 취하지 않는게 현실이다. 환경에 대한 협약도 산업 구조상 후진국에게 피해가 가므로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환경오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외부 불경제로 인한 시장의 실패의 경우인데 후진국은 값싼 제품 가격을 유지해야하므로 환경오염에 대한 가격을 지불하기 꺼려한다. 또 경제 성장 과정에 있어서 에너지 소비율이 늘어나는 것이 정석이므로 환경오염은 굉장히 심각해진다. 환경 산업이 발전한다면 회복가능성이 있지만, 지금 현 상태로는 사실 세계화가 환경오염을 상당히 야기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도적 측면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진정한 세계화를 보는 학자의 입장은 두 가지가 있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아니면 세계화는 신화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한 마디로 지금의 세계화란 완벽하지 않다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OECD 수석 경제학자 프랑수아 셰네가 쓴 '자본의 세계화와 금융의 세계화' 라는 쌍둥이 논문은 국제동학연구소 회원 10명이 공동 집필했을 정도로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을 많이 담고있다. 전반적인 내용에 따르면 여러 기구들이 미국에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고 이사국 제도는 충분히 미국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내용과 위계화(서열화)된 네크워크는 투기성 자본이 이윤이 보일만한 국가들에게만 집중되고 가능성 없는 곳으로는 투자가 되지 않는다는 점, 미국의 각국 화폐들을 평가절상(절하)할 수 있는 금융의 지배력과 정치적인 우위 등 여러 제도적 문제점을 상당히 자세하고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지금의 세계화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성숙하지 않은 가늠하기 힘든 미숙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세계화가 미숙아의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작용 속에서도 상당수가 한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닌 전 세계적 차원의 발전을 위해 세계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으며 이는 여러 측면에서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세계화의 가장 큰 긍정적 측면은 생산성 향상에 있다. 생산성 향상은 외부 효과와 전문화로 인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맨큐의 경제학에서 경제학의 10대 원리를 보면 '한 나라의 생활수준은 그 나라의 생산능력에 달려있다.' 라는 명제가 있다. 이는 자급자족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거의 모든 물건을 만들거나 기껏해야 협업 정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작업을 바꾸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교육 학습 효과로 인한 생산성 증대가 미비한 편이였지만 사적 소유를 인정하게 되면서 이윤 동기가 활발하게 되어 교환을 전제로 특화가 일어나 우리는 한 가지 물건을 생산 아니 한 가지 부품만을 생산하더라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매스컴에서는 제 3세계 개도국들이 선진국들에 의해 빈곤해지고 있는 듯 그리는데 실상은 세계화가 그들에게 일자리를 공급해주고 있다. 비교적으로 보면 차이가 확대될 수 있지만 절대적인 수치로는 빈곤층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세계화로 인해 모든 나라들이 부유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세계화의 촉진은 국가 간의 경계를 허무는데 일조한다. 이는 눈에 보이는 국경은 물리적인 제악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로인해 국가의 영향력 약화가 가속화 되고있다. 최근에 세계화로 인해 정책을 쓰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반발에 부딪혀 국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기사를 우리는 종종 보게된다. 그러나 국민 경제를 이끌어갈 충분한 힘이 있는 조세, 금융, 재정 정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있는 이상, 국가의 경쟁력이 절감되고 무기력해진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국가간의 무역은 게임과 같이 승패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익이 되는 것이라 농업의 경우와 같이 국가의 식량 안보 문제 때문에 사양산업이라 인정하고 놓아버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쟁력 없는 산업은 도태시키고 경쟁력 있는 산업을 키워 서로 교환하면서 생산성이 증대되었다. 이러한 상호의존적인 상태에서 한 나라가 쉽게 다른 나라에게 감정이 있다하여 무역을 안 하거나 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과 일본이 우리나라에 수출 안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큰 타격을 입지만 당사자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금융 영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보는 것은 물론이고 실물 영역에서도 피해가 없을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요즘에는 관세를 마음대로 높게 유지하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비록 몇 년전에 9.11 테러로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되었지만, 국가간의 다자주의 체제가 형성되기 쉽다는 것이 세계화의 또다른 매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대기업이 마음대로 자회사 지부에 돈을 빼서 옮기고 IMF 때 엄청나게 무너진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가 살리고 싶은 기업을 마음대로 살리면서 고위 계층이 사회를 마음대로 조장할 가능성도 세계화로 인해 견제 받는다는 것은 국가와 기업간의 공정한 균형을 지켜주는 좋은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세계화에 대한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처럼 세계화의 도입은 그 무엇보다 상당한 부분에 걸쳐 많은 것을 야기시킨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 이외에도 최근의 농산물시장의 개방에 따른 우리나라 농민들의 피해, 자본의 대량유입과 대량유출에 따른 외환 위기의 위험성 등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후진국이 감수해야할지도 모르는 부담이 상당하다. 경제적인 종속 이외에도 사회적, 문화적인 종속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즉,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한 해외 메이져 문화의 대량유입은(헐리웃 영화, 다국적기업의 단일화 된 상품)각국의 특수성을 약화시키고 강대국의 문화ㆍ사회에 종속되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WTO 같은 세계적 국제기구 회의가 있을때면 항상 유발되는 대규모 시위를 볼 때나, 국내에서의 세계화 정책에 대한 정부-농민, 정부-노동의 갈등을 볼 때나 세계화에 대한 대립은 우리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화 자체는 현 국제사회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고, 국가경제가 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하나의 기회일 수 있다는 측면은 분명하다. 이럴 때일수록 분명한 대책과 처방, 변화에 적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지금부터 시작하는 우리의 새로운 세계화는 세계화를 가장한 초기 국제화의 의식에서 깨어나 전세계의 협력과 화합을 이룩하는 진정한 세계화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인류는 정말 달에 갔었나? -달착륙 음모론

1969년 7월 20일 미국 동부 표준시로 오후 9시 56분. 전세계의 10억 여 명이 숨을 죽이며 지켜본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간이 지구를 벗어나 다른 천체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암스트롱이 가벼운 동작으로 월면을 걷던 모습, 알드린이 '고요의 바다'에 꽂힌 성조기에 엄숙하게 경례하던 모습 등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암스트롱은 달에 첫 발을 내딛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입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것은 여전히 20세기 최대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최대의 업적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최대의 '사기'로...

처음 듣는 사람도 있겠지만 달 착륙에 관한 음모 이론(conspiracy theory)은 아폴로 11호가 방송된 69년 당시부터 계속되어왔다. 음모 이론이란 한마디로 달 착륙이 지구 상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낸들 아나... 하지만 진리는 나의 빛.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지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덧붙여 이후의 내용은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단지 더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한번 더 고민해보길 바라고, 그 중에 한걸음 더 진실에 다가가는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내 글의 실수를 지적해주거나 자신의 다른 생각들을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면, 나는 내 작은 수고에 대한 커다란 보답으로 여길 것이다.

만약 미국이 달 착륙을 조작했다면 그럴만한 동기가 있어야한다. 그래서 세가지 정도를 추측해보았다.

첫째, Apollo 계획에 들어간 돈만 해도 254억불, 1990년 가치로 환산했을 때 950억불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여기에 NASA의 다른 프로젝트들에 들어간 돈까지 합하면 실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이 될 것이다. 돈을 노렸다면 그야말로 사상 최고의 벌이가 될 수 있다.

둘째, 당시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시위가 거세지고 있었다.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전쟁을 계속하기에 달 탐사는 아주 효과적인 소재가 될 수 있다.

셋째, 당시는 냉전이 극에 달했던 상황이었다. 소련이 '핵 개발'을 능가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거대 과학(Big Science)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잡고, 우주를 "개척" 해 나가는 것을 미국이 태연하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달에 갈 수는 없어도 간 것처럼 꾸미기는 쉽다. 게다가 소련만 속일 수 있다면 나머지 다른 국가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달 착륙이 거짓인지 아닌지, 음모 이론가들(conspiracy theorists)이 내세우는 증거들을 토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림자 Ⅰ

달에는 대기가 없다. 지구의 1/6인 달의 중력은 대기를 붙잡아 두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에 도달하는 태양광선은 지구에서처럼 대기층에 의해 반사도 되지 않고, 또 장애물을 거치지 않고 바로 도달하므로 훨씬 밝고 강하다. 게다가 지구에서와 같이 공기 중의 분자들에 의해 빛이 산란되지도 않는다.

그 결과 달에서는 빛에 의해 발생하는 명암의 명도차가 극심하다. 그래서 빛이 비추는 곳은 아주 밝게, 그늘이 진 곳은 아예 까맣게 보이게된다. 지구에서는 공기 중의 분자가 빛을 반사시키기 때문에 그늘에도 빛이 들어가서 '어둡게' 보이기는 하지만 달에서는 그늘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진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분명히 보이지 않아야 할 것같은 그늘 부분이 지구에서처럼 어둡게 보이거나, 심지어는 훨씬 더 밝게 보이는 것이다.

2. 그림자 Ⅱ

태양과 같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광원은 서로 거의 평행한 그림자들을 만들어내지만, 반면 스튜디오의 조명처럼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의 광원은 광원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달에서는 태양이나 지구 이외에 다른 광원이 없기때문에, 달 표면에 드리워진 모든 그림자는 당연히 왼쪽 그림처럼 항상 평행해야 한다.

하지만 사진에 찍힌 그림자들은 평행하지 않다. 착륙선의 그림자와 오른쪽 아래에 있는 암석들의 그림자에 연장선을 이어보면, 마치 사진 바깥쪽 왼편에는 거대한 라이트가 세워져 있을 것 같다.

3. 발자국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의 그 유명한 발자국 사진을 보면, 마치 찰흙에 찍어놓은 것처럼 발자국이 두터운 것을 볼 수 있다. 음모 이론가들 이거 구라라고 주장한다. 수분이 전혀 없는 달 표면에다가, 지구에서의 1/6 정도의 무게를 가진 "가벼운" 우주인이 저런 깊고 뚜렷한 발자국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말이 안되는 것만은 아니다. 달에는 대기가 없기 때문에 흙이나 먼지, 화산재 같은 것들이 날려가지 않고 가만히 쌓이게 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별다른 압력을 받지않고 두껍게 쌓여온 먼지층이라면 우주인의 몸무게로도 충분히 깊은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달에서 찍어온 사진에서는 우주인들과 월면차(LRV, Lunar Roving Vehicle)의 발자국을 쉽게 볼 수 있다.

4. 방사능

Apollo 계획이 진행되었던 1969년부터 1972년은 11년의 태양 활동주기 중에서 태양풍의 강도가 세지는 '태양 극대기(solar maximum)' 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태양 표면에서 '플레어(flare)' 라는 자기 에너지의 격렬한 폭발이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하루 평균 15개의 플레어가 강한 X선을 방출한다고 한다. 또 한번의 극대기 중에는 평균 7-8 번 정도 커다란 규모의 플레어들이 몇시간에서 며칠에 걸쳐 발생하는 특이한 경우가 있는데, 1972년 8월의 경우에는 지구 저궤도(Low Earth Orbit)에서 선외활동을 하고 있는 우주비행사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방사선이 벤 엘런대를 뚫고 침투했다고 한다. X선이나 감마선처럼 투과력이 높은 방사선을 차단하려면 납이나 콘크리트와 같은 물질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주선의 선체는 대체로 얇은 알루미늄으로 되어있고, 우주복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두 가지 모두 방사선에 대한 차단재 역할을 할 수 없는데, 과연 NASA 가 비행사들의 생명을 보장할 만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는 지는 알 수 없다.

5. 별

NASA가 공개한 사진 중에는 달의 하늘 부분에 별이 찍혀있는 것이 단 한장도 없다. 달에는 대기가 없기때문에, 지구에서와 같은 푸른 하늘 없이 바로 우주 공간이 드러난다. 따라서 달에서는 낮에도 별을 볼 수가 있고, 당연히 사진에도 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이론가들은 NASA가 그 복잡한 별들의 배열을 일일히 위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지워버렸다고 주장한다. 만약 실수가 발견된다면 천문학자들이 바로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6. 극심한 온도차

달에는 대기가 없기 때문에 표면 온도가 낮에는 127 ℃ 까지 올라가고, 밤에는 -153 ℃ 까지 떨어진다. 하지만 한번에 7시간 이상(Apollo 15 이후) 선외활동을 벌인 우주인들이 더위나 추위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다는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이 온도에서는 필름이 녹거나 얼어버리게 된다. 우주복과 카메라의 방열, 방한 기능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또 하나, 대기가 없다는 것은 온도차가 클 뿐만 아니라 온도 변화도 급작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시간 내에 일어나는 커다란 온도 변화는 착륙선의 동체뿐만 아니라 달 표면에 설치한 여러가지 실험 기구들에게도 심각한 파손을 초래할 수 있지 않을까?

7. 달 착륙선

높이 6 m, 무게 15 톤의 착륙선은 아마도 크기에 비해 가장 많은 임무를 수행한 우주선일 것이다. 일단 착륙선의 상당 부분은 착륙과 이륙을 위한 2 개의 로켓 엔진과 연료가 차지하고 있다. 거기에다 크게는 승무원을 위한 산소와 컴퓨터, 통신 설비, 온도 조절장치 등이 필요하고, 그 밖에 비행사들이 메고 나갈 PLSS(Portable Life Support System)와 달 표면에 설치할 실험 기구들인 ALSEP(Apollo Lunar Surface Experiments Package), 카메라 등등이 실려야 한다. 여기에다 Apollo 15 이후에는 월면차도 추가된다. 게다가 임무를 완수한 후 달표면을 떠날 때는 착륙선의 상단 부분만이 이륙하고 하단 부분은 발사대로 쓰이게 되는데, 이때 무게는 5 톤이고 부피는 훨씬 줄어들게 된다. 달 궤도에 진입하는 데 쓰일 엔진과 연료, 승무원이 서 있을 빈 공간을 제외하면 과연 어느정도나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과연 거기에 컴퓨터와 통신 장비, 달에서 수집한 샘플, PLSS 등등이 다 들어갈 수 있을까?

1960년대 후반의 기술로는 우주선의 부피를 모두 컴퓨터로 채워도 모자랐을 것 같다. 에니악(ENIAC)이 만들어진 것이 46년, 집적 회로의 개발이 58년의 일이다. 이때는 4 비트 프로세서가 개발되기도 전이고, 당시의 메모리는 지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착륙과 이륙, 도킹을 계산하고 실행하는 데 필요한 컴퓨터라면 상당한 부피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8. 밀고자

음모 이론가들은 NASA가 공개한 사진들에서 발견되는 헛점들이 실수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NASA 내부에 있는 '밀고자들'(whistle-blowers)이 일부러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 이른바 밀고자들이 달착륙의 조작에 동참했었지만, 어떤 이유에선가 진실을 알리기위해 일반인에게 공개될 사진 등의 자료에 Apollo 계획이 거짓이라는 단서들을 교묘하게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9. 그 밖의 다른 추측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 실제 달에 착륙하긴 했지만 그들이 달에서 발견한 어떤 것을 은폐하기위해 사진 등의 자료나, 혹은 임무 전체를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그 '어떤 것'에 대한 추측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지는 것은 "외계인의 흔적" 이나 "고대인의 유산" 등이다. 그래서 혹자는 미국 정부가 계속해서 은밀하게 외계인과 접촉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 예로 미 공군의 B-2 스텔스 폭격기에는 수직 꼬리 날개가 없는데, 이런 특이한 구조는 현대의 항공 역학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최신예 폭격기가 외계인의 '반중력' 기술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튼 이런 것들은 미국의 '로즈웰 UFO 사건'과 같은 또 다른 음모 이론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http://spaceflight.nasa.gov/gallery/images/apollo/index.html  
NASA에서 공개하는 Apollo 임무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2009년 1월 14일 수요일

비커밍 제인 (Watching 'Becoming Jane')

 

It is said that chatting or love stories in the Victorian Age(eighteen century) in small towns in England had a big influence on society as nowadays popular culture or mass media does.

Especially romance of the upper and middle class shows society itself, a view of love, or old customs. Jane Austin, the originator of these days love stories, wrote six novels like <Emma>, <Sense and Sensibility>, <Pride and Prejudice>, <Mansfield Park>, <Persuasion>, <Northanger Abbey>, and all of them have being read, loved and sometimes made into dramas or movies. This time a new movie, <Becoming Jane> comes out. What makes this movie special is this movie shows Jane Austin's real life. But personally I am sorry that I can't find any big difference from any other movies.

Generally writers use both their real experience and imagination when writing books. Through this movie, we can go into Jane's real love, and life and find out why she became a writer, why she didn't get married, and how her novels reflect her life. I think those factors make movies attractive. Because of our mortality, when we see a movie, we can experience others' lives. Furthermore, we can make our own opinion about diverse situation that we are not really in.

When I see this movie, I can notice that her real sweetheart, Tom Lefroy behaved arrogantly just like Darcy in her novel, <Pride and Prejudice> and the scene where Jane left Lefroy reminded me of one in her another novel, <Persuasion>. Despite the fact that this movie is about her real life, there are some differences between this movie and her own romance. It's sad that we can't find out enough evidence to prove the facts. Her sister did her best to cover up her private life. After Jane died, she got rid of many of Jane's letters. That's why written stories that we can reach are not relevant. Furthermore, Jane used lots of metaphor in her letters and that makes hard for us to understand them.

Unlike nowadays when women also are respected because of her own capacity, in the Victorian age, a woman who could have a propose from a nobleman and save her family from poverty was considered lucky. Although Jane usually wrote stories with happy end, she chose the writing rather than true love for her happiness and her lover's future. While I see this movie, I picture many women who are not longing for marriage but are willingly doing their own work. And I want to give them encouragement.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의 역사

-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를 읽고

서점을 찾았을 때, 이 책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인데다가 요즘 문화교류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십자군전쟁을 지중해 양편의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교 중동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한 사건임과 동시에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융합을 촉진한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11세기 이후 서유럽 사회는 안으로 인구의 증가, 농업 생산의 증대, 도시의 부활 등으로 오랜 침체 끝에 수세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꾀하였다. 엘베 강을 넘어 독일인이 슬라브 땅에 식민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재정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황권의 신장, 이탈리아 상인과 봉건 제후들의 세속적 욕망, 성지 탈환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유럽 세력 팽창의 대표적 사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기독교인․이슬람 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 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 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1095년 삐아첸자(piacenza)와 끌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제국의 알레시오 황제가 파견한 자들로부터 동로마제국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듣고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자고 호소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대한 열망, 동방과의 무역을 원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업적인 야심등의 요인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특히 십자군에 참가하여 대사를 받고 전사할 경우 순교자가 된다는 것도 열성적인 신자들을 원정군에 쉽게 참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제1차 원정에서는 비조직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농부들도 많이 참가하여 교회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라인 지방을 지날 때, 흥분한 나머지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로 유혈 참사가 일어났는데 발칸 지역을 지날 때에도 지휘자의 통솔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이들은 지방 주미들에게도 방화와 학살로 참극을 일으켰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많은 원정군들이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전에 셀주크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원정군들이 악전고투 끝에 1098년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참살하는 비 그리스도교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서유럽에서 이곳까지 도달하는 전투에서 이슬람군들의 매복병들의 습격을 받아 매일 매일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하는 가운데 겨우 살아 남은 이들의 보복심리와 이슬람 군들의 항전의 악순환이 서로를 살육의 참상으로 몰고 갔다.

이런 악순환의 결과는 생사의 기로에서 양측 모두 이성적인 자제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존의 본능만이 절대 기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원정은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뎃사가 함락(1144년)되면서 시작되었는데(1147~1149),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설교로 추진되었지만 터키인들과의 여러 번의 전투에서 전멸되어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제3차 원정(1188~1192)은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Friedrich)황제가 인솔한 잘 조직된 십자군들이 이코니움에서 터키인들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황제가 1190년 살레프에서 익사함으로써 지휘자를 잃은 군대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영국의 왕 리차드(Richard) 1세, 프랑스의 필립(Philipp) 2세등이 참가하여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십자군들이 성지의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살라딘 술탄과 화해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평화로운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제4차 원정(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호소로 시작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두가 마지막으로 이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완전히 교황의 의사를 거스르고, 이기적이고 상업저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라가하고(1204. 4.13)라틴 제국이 그곳에 설립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되시는 심하게 약탈되고 황폐하였으며, 이러한 난폭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은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동방세계의 방위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 5차 원정(1217~1221년)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어 1217년에 실행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파견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파문을 받았다. 원정군은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 국가의 약소한 군사력으로 편성되어 이집트를 공격하여 다미에타를 공격하는 적은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지 재탈환을 복음 정신에 따라 평화로운 포교로 해야 한다는 본래의 정신에 따라 무방비 상태로 성지에 가서 술탄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술탄이 성인을 너그럽게 대우하여 풀려났고, 이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의 평화로운 선교활동이 성지에서 시작되었다.

제 6차 원정(1228~1229년)은 교회 당국과는 무관하게 파문 중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인 원정이었다. 그는 이집트 술탄과의 담판을 통해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환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그후 1224년 결정적으로 다시 잃게 되었다.

제 7차 원정(1248~1254년) 및 8차 원정(1270년)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실제적인 원정은 모두 끝났다.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는 우선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성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1205년4월 카이로에서 완패 당해 후퇴했는데 그의 군대에 전염병이 돌아 전의를 상실하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를 위해서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 자신은 이슬람에게 다미에타(Danietta)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서방에서는 차츰 십자군 원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비폭력적인 설교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유럽 자체 내에서는 이교도 문제, 즉 스페인의 무어인, 이교 슬라브인,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등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왔다. 이로 인해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사실 십자군 전쟁은 모든면에서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십자군전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무장마저 허술 했던 것,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역으로 원정한 것, 국왕과 대영주들이 참전해 지휘부가 대립한 것, 중동 이슬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데다 심자군 원정의 기본 이념마저 변질된 것 등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다.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 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중해를 배경으로 비록 무력을 동원한 충돌이었지만 두 문명이 교류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책 또한 그동안 읽었던 많은 십자군 전쟁에 관한 책들과 마차가지로 지나치게 유럽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009년 1월 13일 화요일

미네르바 체포에 가려진 무서운 사건

 오늘도 잠자리에 들기 전 몇몇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다가 정말 화가나고 한편으로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블로그에는 링크가 걸려있었고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영어로 작성된 기사가 나왔습니다.

기사의 주요 내용 중 아래 문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Lee has pledged not to seek a new apology from Japan for the use of force labor and sex slaves during colonial rule"

혹시나 제가 오역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번역기를 돌려보았더니

"Lee는 식민 통치동안에 강제 노동과 성 노예들의 사용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사과를 찾지 않기 위하여 서약하였습니다" 라고 번역되더군요.

번역기로 한 번역이라 그런지 다소 말이 안되긴 하네요. 그렇지만 이 것만으로도 뜻은 충분히 전달됩니다.

 제가 본 블로그의 글은 이명박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미네르바 체포 사건으로 관심을 돌리고 추진한 일이라고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다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보다 일본 언론들의 만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은 국회 입법 전쟁, 미네르바 체포, 제 2롯데월드, 언론법 등 수 많은 이슈들로 매일 두통에 시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러한 국민들 중 한 사람이구요.
물론 위에 언급한 사안들은 매우 중대한 사안들입니다만 위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냥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서 이 글을 씁니다. 

 혹시나 제 글이 유용하다고 생각하셨다면 부디 추천해주시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길 간절이 바랍니다.

아래 사이트에서 이 글에 대한 토론이 진행중입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http://www.twar.co.kr/tbattle/view.php?a_id=16555&tag=1&list_type=0


저 링크 연결이 안될까봐 캡쳐해둔 이미지 파일을 함께 올립니다. (클릭 후 보세요)

2009년 1월 12일 월요일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건축물 BEST5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다음 메인에 노출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잘못된 부분이나 틀린점은 언제든 댓글이나 트랙백으로 쏴주세요!!

그리고 시간이 되신다면
http://shukri.tistory.com/?page=1 
(제 블로그의 첫페이지)에도 들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열심히 쓴 글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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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도 수 많은 건물들이 있지만, 랜드마크를 확실히 하고 있는 건축물은 아직 없습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전히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대다수이죠.

 정말 신기하게 생긴 창조적인 건축물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미국 미주리주의 캔자스 시립 도서관입니다. 도서관 옆 주차장 입구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책들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더 멋진 사실은 이를 캔자스 시민 모두가 함께 만들었다는 겁니다. 캔자스 시청이 시민들을 상대로 가장 좋아하는 책을 설문조사 한 후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도서를 뽑아 건물 앞에 나열했으니 모두가 함께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비슷한 컨셉의 도서관입니다. 영국의 웨일스에 있다고 하네요.

 

 다음으로 미국의 '롱거버거 빌딩'입니다. 이 건축물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바스켓 모양입니다. 실제로도 이 롱거버거 빌딩은 바구니를 만드는 회사라고합니다. 회사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이 건물을 기획한 사람은 회사의 CEO인 롱거버거이고 목적은 회사를 알리기 위한 홍보수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네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는 큐빅 하우스도 대표적인 신기한 건축물입니다. 이 건물은 각 큐빅마다 따로 독립된 3층 아파트입니다. 사방이 창문인 큐빅 하우스는 탄성을 자아내는 전망을 자랑하죠.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건축물이 40년전에 건설된 건물이라는 겁니다. 1970년대에 개발된 큐빅 하우스는 디자이너 피에트 블롬의 작품이죠. 


 폴란드에도 유명한 신기한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일그러진 집으로 불리는 '크로크드 하우스(crooked house)'입니다. 2층으로 된 크로크드 하우스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건축가 szotynscy zaleski가 동화 속에 등장하는 집을 보고 똑같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을 보러오는 관광객들이 많다고 합니다.




 마지막 주인공은 체코의 몰다우 강가에 있습니다. 해체주의 건축가인 미국의 프랭크 게리와 체코의 밀루닉이 함께 설계한 이 건물은 1995년도에 지어졌습니다. 왼쪽은 여자무용수 오른쪽은 남자무용수를 상징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댄싱 하우스로 불립니다.

 창조적인 건축물 하나로 수 많은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는 도시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건축물들이 하루 빨리 태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한국 비하 애니 헤타리아, 완전 분석!

 헤타리아라는 만화는 2009년 1월 24일 날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으로서, 원작은 웹툰이라 합니다.
솔직히 저도 이 글을 연구소에 올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은 어찌 주체할 수가 없네요.
헤타리아라는 만화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헤타리아는 일종의 BL(Boy's Love)개그 만화 로서, 국가 의인화를 하는 특이한 설정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했구요.
2차 대전은 깊게 파고 들지는 않겠습니다만, 주범들은 이탈리아, 일본, 독일인 것은 알고 있으시죠?
바로 그 헤타리아에 우리 '한국'도 있다는 사실.


특이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한국도 있구나. 라는 사실에 좋아해선 안됩니다.

 



이게 헤타리아에 등장하는 '한국'이라는  캐릭터의 사진 입니다.
네, 허우대는 멀쩡하죠.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 싫은 캐릭터는 아닙니다. (제 눈에는 조금 찌질하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헤타리아가 애니화가 된다는 말에 한국인들이 화낼 만한 설정을 하나하나 보이겠습니다.


1. 일장기를 착용한다.
맙소사, 이건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이 일본에게 해방된 지가 몇 십년이 흘렀는데 일장기를 착용하다니요.
네, 저도 다른 걸 다 떠나서 저걸 보고 입을 떡 벌어지더군요. 거기다가 들고 있는 것도 아닌, 일장기를 가슴 쪽 부근에 걸고 나오더군요.
한국이란 캐릭터로서 태극기도 아닌 일장기를 착용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2. 중국의 한자를 우리나라의 것이라고 우긴다.
아니, 우리가 언제 우겼습니까? 중국의 한자를 보고 우리가 우긴 적이 있습니까? 적어도 제가 이번년도에 국사 시간에서 배울 때는 그런 말 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 빌려 쓰기는 했어도 우리 나라의 것이라고 우긴 적은 없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3. 중국과 형제 관계다.
우리는 엄연한 독립국으로서, 중국과 형제 지간은 아닙니다. 이건 뭐 저도 태클 걸 게 없으니 패스.


4. 일본의 가슴을 자주 만지는 변태다.
일장기 다음으로 좀 심하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본의 가슴이라 하면은 독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가슴이라는 점이 조금 걸리는 것 같네요. 일본이 우리 땅인 독도를 넘 탐하는 것 같네요.

그래서 신체 일부에 속해 있는 일본의 가슴이라고 하고, 뭐 그런거겠지요.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인데 욕 할 것 같아서 여기서 자제합니다.

 

이 글에 대해 죄송합니다. '뺏긴'게 아니라, 월래 우리 땅이었는데 저도 격하다보니 저렇게 되었습니다.


5. 우리나라 광복절이 5월 1일이라 한다.
우리나라 광복절은 8월 15일이죠, 참고로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라 합니다.
오나 내가 미치겠네, 한국에 대한 사전조사도 안하고 이러면 말이 됩니까. 응, 그래요?


6. 2번을 봤듯이 뭐든지 우리나라의 물산이라 우기고, 우리나라를 칭송하는 말만 한다.
우리가 언제 뭐든지 우리나라 것이다! 거렸습니까? 아, 그래. 독도 보고 우리나라 것이야! 하니까 샘났나요?


7. 미국에게 빌빌거린다.
우리 한국 사람들 미국에게 빌빌 거린 적 없습니다. 양키소 들어온다고 할 때도 촛불집회로 애국심도 보였고(요즘 들어 문제점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리고 지금 제 머릿 속에 떠오르는 한 분 이외의 사람들은 찌질하게 미국에게 빌빌대지 않습니다^^

 

네. 이게 만화에서의 우리나라의 특징입니다.

정말 어이가없죠? 이 만화가 방영된다면 한국인의 인식이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어떻게 박힐지 뻔하군요.

 

이 밖에 헤타리아는,

정발판 만화가 아니라 '웹툰' 이고

 

이태리 + 독일 + 일본을 중점으로,  (세계2차대전에 참전했던)

이태리, 독일을

싸움에는 약하지만 밝은 성격으로 미워할 수 없는 '이탈리아'와 엄격하고 고지식한 '독일'을

표현하고있다고 합니다.

 이태리는 모르겠지만 이미 독일은 고개까지 숙이며 반성하고 있는 나라인데,

다시 이런 지저분한 얘기를 꺼낸다는 겁니다.

 

                                          한국인 캐릭터입니다.





 


 

 

저 가타카나 읽으면

우리나라 만세에에에에에아아

이거네요

 

 



 
                                              그런데 더 웃긴건,
 

일본인 성우들을 좋아하고 일본만화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중에서는

 '헤타리아' 는 만화일뿐이며 민감하게 대처할 필요가 없다는둥,

 

헤타리아를 감싸고 있다는겁니다

  

여러분, 이래도 감싸고싶습니까?

이래도 헤테리아를 아무렇지않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헤테리아 라는 만화를 제대로알고 아예 보아서는 안됩니다.

혹시라도 만화를 좋아하는 주위친구들이

이런 사실도 모른체 곧 방영될 헤타리아를 보고있다면 우리는 깨우치게 해야됩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않게 손놓고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당하게 되는겁니다.

 
마음것 퍼가주세요.

그리고 알려주세요.

2009년 1월 10일 토요일

제2 롯데월드, LOTTE때문에 JOTTE겠네

 


 지난 7일 잠실 제2 롯데월드 신축을 허가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물론 놀이공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작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 나온 얘기는 문제는 아니지만 서울공항 작전운영과 비행문제에 관련한 것들입니다.
작전변경이나 비행운영은 군과 정부차원에서 알아서 한다고 쳐도 활주로 각도를 3도 변경하기로한 대안은 결국 또 국민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겨우 3도 변경하는데 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활주로 3도 변경에 드는 비용이 대략 500~1000억 이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입니다. 공군과 롯데측에서 서로 얼마를 부담할지 논의중이라는데 서로 얼마를 부담하다니요? 공군에서 부담하는 것은 결국 우리 혈세에서 부담하는 것과 크게 다를바 없을텐데요.

 수익자 부담원칙,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롯데월드가 정부기관이나 공공기관이었나요? 재벌 기업에서 돈 벌겠다고 짓는건데 무슨 협의가 필요하다는건가요?

 제2 롯데월드가 모든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정부에서 돈을 왜 내냐는 겁니다. 결정은 정부의 권한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정부의 부담은 곧 우리의 혈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친기업 정부라지만 그렇다고 국민들은 무시하겠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이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