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이 책은 매우 진지하다. 학술적이라는 뜻이다. 책제목을 보고 이상야릇한 상상을 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대단히 죄송스럽게 됐다. 하지만 어쩌랴. 이 책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라면, 이상야릇한 잡지 두 권을 구입할 수 있으니 위에 언급한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물론 특정 부류의 독자들만 이 책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 대부분은 ‘강간’이라는 낱말에서 다양한 뉘앙스를 포착할 수 있도록 ‘교육’받아 왔기 때문이다. 어떤 교육인가. 그것은 ‘금기를 바로 보지 말고 되도록 피할 것’. 따라서 그 뉘앙스가 포착되는 지점은 폭력과 섹슈얼리티의 사이 그 어디쯤이다. 폭력과 섹슈얼리티. 이 두 가지 사회적 금기가 뭉뚱그려져 있는 ‘강간’이라는 단어 앞에서 태연하라는 요구는 그래서 무리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강간에서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감수성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수성은 역사적으로 고정적인가? 물론 아니다. 이 책의 지은이 조르쥬 비가렐로는 바로 이 점, 즉 강간에 대한 감수성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강간의 역사이자, 그에 대한 감수성의 역사이다. 덧붙이자면 ‘강간의 역사’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옛날 옛적의 강간행위나 오늘의 강간행위나 기술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변한 것은 그것을 대하고 해석하는 우리의 인식이며 감수성일 따름이다.
강간에 대한 전근대의 시선
이 책에서 언급된 수많은 강간사례들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단연 앙시앵 레짐 시대의 강간사례이다.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며 피해자도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비가렐로는 이것을 시대적 정서의 틀로 바라볼 것을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성폭력과 그에 대한 심판은 집단적인 하나의 세계 및 그 변화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조금 쉽게 이야기하면, “희생자가 어떤 계층에 속하는가에 의해 그 죄의 경중이 가려진다.” 현대적 시각으로 봤을 경우 대단히 웃기는 이야기들이다. 물론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 없는 정서도 있다. “도발은 여성의 몫이라는 명제가 팽배해 있는 사회” 이 구절을 읽고 어이없다고 웃는 독자들은 비교적 건강한 정신을 지녔다고 보면 된다. 혹여, “맞는 말 아냐?” 라는 반응을 보이는 독자들이 있다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 된다.
여성, 그리고 아동 주체의 문제는 이 책에서 제법 심각하게 다루어진다. 비가렐로는 강간이 나름대로 정당화되는 주요한 근거를 바로 여성과 아동이 하나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점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든, 아동이든 그들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의 반응은 애초에 이미 정해져 있고 따라서 “도발은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게다가 강간의 문제를 소유물에 대한 침해 문제로 바꿔치기 하는 시대적 정서와 지배자들의 담론, 그리고 이를 그대로 수용해버리는 여성들의 총체가 바로 전근대성의 모습이었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법의 존재여부에 대해 궁금해하실 것이다. 물론 법은 존재했다. 문제는 그것이 무용지물에 불과했다는 점에 있다. 감수성이 쇄신되면서 법의 외적 변화를 이끌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소를 제기하는 일이 그만큼 증가한 것은 아니라고 이 책은 증언한다. 우리는 언제나 절실하게 느끼지 않는가, 법과 현실의 불일치를!
‘개인’ 중심으로 옮겨간 근대의 시각
18세기 말부터 강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신성모독, 소유권 침해의 문제에서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위협의 문제로 변화해간다. 물론 “남자 혼자 성인 여성을 강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고정관념이 전면적으로 바뀌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쨌든 비가렐로는 모든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18세기 말에 있었던 ‘중대한’ 변화에 주목한다. 사회적인 시선이 ‘개인’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근대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의 형법개정의 내용을 차례차례 개괄하면서 범죄가 ‘발명’되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또, 19세기 내내 이루어진 이 작업과정에 대해 “부분적이지만 폭력을 희생자에게서 출발하여 정의하는 희생자 중심의 시각”이 싹트는 과정으로 분석한다. 여기서 우리는 ‘희생자 중심’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진행되어온 이 작업의 성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내적 성숙을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닐까. 여전히 상당수의 사람들은 일부 여성단체에서 주장하는 희생자 중심의 수사가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평가한다. 잣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안의 전근대성에 있는 것이다.
“강간의 결과는 이제 더 이상 타락이 아니라 정체성의 균열, 희생자가 영원히 지니고 살아야 할 것 같은 깊은 상처이다.” 누구나 비가렐로의 이러한 지적에 공감하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연민 차원의 공감대에 의해 의식 내부의 전근대성이 움직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천진한 생각이다. 책을 읽는 동안 줄곧 웃어댔다. 미개하고 더럽고 치사한 책 속의 전근대적 시대상들을 마음껏 조롱하면서.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국 사회는 이 책 속의 어느 시대쯤에 위치해 있을까 하는 물음. 소름끼치지 않을 수 없다.
움..역시 다양한 역사가 존재하는 군요.. ^^^;;;
답글삭제@또자쿨쿨 - 2009/01/10 00:47
답글삭제그렇습니다. 차라리 역사.문화 등 좀 더 역사와 연관성 있는 주제와 묶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