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30일 화요일

끝내 밝혀내지 못한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대구 성서초등학생 5명이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면서 와룡산 골짜기로 들어간 후 행방불명되자 가족들은 경찰에 이를 신고하였다. 경찰은 처음에 단순가출로 판단했으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이들이 귀가하지 않자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대규모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와룡산 주변에 대한 수색에 나섰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다시 실종된 지 백일이 지나자 특별수사요원 50명을 선발하여 실종어린이 부모들과 1주일 동안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앵벌이 조직과 아동보호소 등을 뒤졌지만 허사였다. 그 후 10년 동안 경찰을 비롯한 많은 기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실종소년들을 찾기 위한 운동에 대대적인 동참을 하였다. 대구시는 수천만장의 전단을 제작·배부하였고, 교육부와 각급 교육청들이 개구리소년 찾기 캠페인을 벌였으며, 아이들의 사진이 담긴 광고전단지, 전화카드, 신문과 방송을 통한 홍보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위제보, 무속인의 추측 등만 난무하였다.

 사건 발생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 오전 11시 30분경 대구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편 와룡산 기슭에서 도토리를 줍던 한 주민에 의해 개구리소년 5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와 신발 등 유류품이 발견되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요원, 경북대 법의학과 교수 및 수사관 등 45명 합동으로 유골발굴작업 및 유골발굴지로부터 반경 150m 주변을 수색한 결과, 두개골 5구 등 유골 50여 점, 운동화 4켤레, 비닐구두 1켤레, 체육복 2벌, 파자마 1점, 팬티 4점, 잠바 2점, 내의 3벌, 양말 4켤레, 주황색 티 2점, 혁대 1점, 전자손목시계 1점, 장난감 1점, 탄두 351개, 탄피 1개를 발굴하였다. 발굴된 유골의 시료와 실종소년 어머니들의 혈액을 채취하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DNA를 감정한 결과 실종소년들의 유골로 확인되었다. 실종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되자 그동안 달서경찰서에 설치되었던 수사본부를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45명으로 구성된 수사본부를 차려 재수사에 임했다.

 개구리소년들의 사망원인에 대해 경찰은 저체온사 혹은 동사를 주장한 반면, 경북대 법의학 교수팀은 아이들의 두개골에 난 여러 개의 흉기 흔적으로 보아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뒤 암매장 되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해 사건은 사실상 미궁에 빠졌다.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남으로써 사실상 수사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실종사건 직후의 초동수사 및 수색작업의 실패, 유골발굴과정에서의 경찰의 현장 훼손, 사인을 둘러싼 논란의 실체 규명 실패 등으로 경찰수사에 많은 허점을 노출시켰다.

 특히 경찰이 유골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현장을 무분별하게 마구 파헤치는 바람에 원래 유골의 위치나 행태 등을 훼손하여 현장을 원형대로 보존하지 못했다는 점이 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장의 훼손은 나중에 사인 규명에서 저체온사 혹은 사고사 및 타살 여부를 밝혀줄 수 있는 최소한의 증거들을 훼손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은 국내에서 가장 다양한 과학수사 기법이 동원된 사례이기도 했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일반 법의학을 비롯한 법의곤충학, 법의인류학, 토양학 등이 대거 적용됐다. 경북대 법의학팀이 참여하였고, 법의곤충학자가 시신발굴현장에서 파리 같은 곤충의 껍질을 수거해 조사를 벌였다. 유골과 옷가지에 묻은 흙이 와룡산의 것인지에 관한 토양학 검사도 했다. 곤충이나 토양이 와룡산의 것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 살해된 뒤 이 곳에 암매장되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외국의 저명한 법의인류학자, 고고학 전문 동물학자 등에게도 자료의 판독을 의뢰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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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는 많은 사건 기록들이 있습니다.

MB의 재산헌납 공언, 민심을 읽어보니

 재산헌납을 공언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묵묵부답이다. 이에 네티즌들은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불신도 커져가고 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시절 "우리 내외가 살아갈 집 한 칸 이외 가진 재산 전부를 내어놓겠다. 이 약속은 대통령 당락에 관계없이 반드시 지키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취임 이후 재산헌납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여론에 "어느 방식이 가장 효율적일지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의견을 수렴 중"이라며 "진행 중"이라는 것만 강조할 뿐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지난 3월엔 "올해 상반기 안에 재단법인이 출범할 예정"이라며 재단 이름은 이 대통령의 어머니 이름을 딴 "태원장학재단"이 유력하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송정호 전 법무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재산기부 추진위원회" 구성이 마무리됐으며 류우익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재후 김&장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소설가 박범신, 유장희 이화여대 명예교수,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등이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약속했던 올 상반기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네티즌들의 불신은 커지고 있다 . 일부에선 "헌납한다고 발표하고 결국 명의만 교묘하게 바꾸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목소리까지 제기되고 있다.  티워리서치 결과 응답한 2843명의 네티즌 중 무려 90%가 이 대통령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 대통령이 올해 공직자 재산신고 때 신고한 전체 재산은 356억 9000만원으로, 시가 34억 2000만원의 논현동 자택을 제외하면 사회환원할 재산 규모는 32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디어법, 누구를 위한 법일까? - 국민 98% 반대

 6월 임시국회가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무소속 등 국회의원 177명의 소집으로 26일 열렸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은 한나라당이 미디어 관련법 등 쟁점법안을 강행 처리할 경우 강력 저지하기로 
해서 여야격돌이 우려되고 있다.   



  25일 MBC 100분 토론 시청자 투표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98%가 여론수렴 불충분을 이유로 6월 국회에서 '미디어법'을 처리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고,  시청자 의견 게시판에도 미디어법을 반대하고, 한나라당의 단독 국회 소집을 성토하는 글들이 다수 올라와있어 미디어법에 대한 여론을 읽을 수 있었다.

 국민 98%가 반대하는 미디어법은 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

 한편 미디어 관련법 등 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여야는 사활을 건 대립각을 세우고 있어, 극적인 막판 합의가 없는 한 단독 국회에서 여야간 입법 전쟁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최저임금 겨우 110원(2.75%) 오르는데 그쳐

 
 2010년 시간당 최저 임금이 올해보다 겨우 110원(2.75%) 인상된다.


 5150원(28.7% 인상)을 제시했던 노동계와 3770원(5.8%삭감)을 제시했던 경영계는 협상 초반부터 난항을 겪었다. 최종결정 시한이 다가오면서 4800원과 3840원으로 한발 양보했으나 합의해 실패해 결국 공익위원들이 내놓은 절충안을 두고 표결에 부쳤고 찬성 23표, 반대 4표로 통과됐다. 공익위원들이 내놓은 절충안은 2.75%로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은 인상률이다.

 물가상승분을 반영해서 최저임금을 올려야 할 상황에서 도리어 최저임금을 삭감안을 내놓았던 경영계에 노동자들은 물론 네티즌들도 반발했었다.   

 
물론 세계적인 경제난으로 기업들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항상 허리띠 졸라매자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가진자들이 고통을 분담해야 진정성이 나오는 것이다. 항상 사용자들은 고통 분담을 요구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고통을 분담한 적이 없다. 이번 경영계의 최저임금 삭감안은 이러한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현재 시점에서 최저임금 삭감안이 나왔던 나라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2009년 6월 29일 월요일

대자연이 살아숨쉬는 비무장지대(DMZ)


 비무장지대는「정전협정」에 규정되어, 군사분계선에서 양측이 2km씩 후퇴하여 완충지대로서 설치한 지역이다. 서쪽은 한강 하구의 교동도, 동쪽으로는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에 이르는 248km에 이르는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분단의 상징이다.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에는 철책선이 없고, 군사분계선임을 표시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정전협정」에 의하면 비무장지대에서는 개인 화기(권총 혹은 단발식 보총) 이외에는 무장이 금지되어 있고, 군인과 민간인의 출입 또한 통제되었다.
 
1. 비무장지대의 역할
「정전협정」제10항에 의하면,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은 UN군 총사령관이, 이북지역은 인민군 및 중국군 총사령관이 관리책임을 맡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남북한이 비무장지대에 대한 독자적인 결정과 변화를 시도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러한 문제는 경의선과 동해선, 그리고 금강산 육로 관광문제를 둘러싸고, 해당 지역의 비무장지대 통과에 대한 관리 책임을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2. 전망
 최근 비무장지대는 남과 북의 대립의 상징으로서만 아니라 자연의 보고로서 보존의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발이 정지된 곳이어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비무장지대는 지난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의선과 동해선, 그리고 금강산 육로관광이 실시됨으로써 조금씩 개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판문점을 통해 이루어졌고,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2003년 10월에는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과 남북 합동 축하공연 참가를 위한 대규모 방북단이 판문점이 아닌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 앞으로 대규모 방북이나 금강산 관광, 경의선·동해선 연결 등이 이루어지면 군사분계선의 여러 곳이 개방될 것이며, 이렇게 될 경우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의 변화가 요구될 것이다. 이는 곧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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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과 JSA 공동경비구역 방문

  판문점을 관광하게 되면 판문점에서 지켜야 할 몇가지 사항들에 대해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병헌, 송강호, 이영애 주연의 JSA 공동경비구역이라는 영화에서 우리 군이 북한군과 마주보며 경비를 서던 바로 그 곳입니다. 실제 촬영지는 판문점이 아닌 경기도의 한 세트였다고 하네요.

 판문점 뒤로 보이는 북한 건물.
북한군이 나와서 지켜보고 있네요.
북쪽 관광객들이 있을 때만 내려와 경비를 선다고 합니다.

  망원경으로 감시하는 북한군.



 판문점 내부입니다.
이 곳에서 남북회담이 열리게 되죠. 테이블 중간의 깃발과 세개의 스피커가 남과 북의 경계입니다.


 건물 가운데 보이는 낮은 시멘트 턱이 남과 북의 경계라고 합니다.
아 그리고 이곳에서는 절대 손짓을 하면 안된다고 하네요.
총을 겨누는 모습으로 오인되기도 하고 북쪽을 찬양한다는 선전물로 쓰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 판문점을 관광하시는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판문점에 방문하시면 분단의 현실을 더욱 실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루 빨리 남북한이 평화통일되기를 기원합니다.

판문점의 상징적 의의


 최근 판문점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간의 잦은 접촉과 회담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곳이 되었다. 이곳을 지나 대규모 방북단이 오고가고 있으며, 외국인의 경우는 판문점을 통해 남북한을 동시 방문하고 있다. 또한 판문점은 긴장과 대립의 상징을 넘어서 관광지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들이 판문점을 이용한 관광상품을 개발 중이며,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긴장과 대립의 상징으로서 냉전의 최전선으로만 여겨졌던 판문점이 냉전의 해체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화해와 협력의 상징으로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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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의 역할, 어떻게 변했나?

 
 “판문점”은 행정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의 어느 행정구역에도 소속되지 않는 특수지역이다. 1953년 7월 이곳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 UN측과 북한측의 ‘공동경비구역’이 되었으며, 그 해 8∼9월에는 1개월에 걸친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주로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1971년 9월 20일 열린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계기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담장소뿐 아니라 남·북한간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 및 남북을 왕래하는 통과지점으로도 활용되어 왔다. 약 800m의 정방형 지역으로서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양측의 경비병들이 서로 오갈 수 있었으나, 이 사건 이후 공동경비구역에서 분할경비지역으로 변모하여 서로 상대방의 지역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하였다.


  판문점에는 회담장 이외에도 남측의 ‘자유의 집’, ‘평화의 집’이 있고 북측의 ‘판문각’, ‘통일각’ 등이 있으며,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자유의 집은 남북 적십자 연락관실로 쓰이다가, 1998년 새로운 자유의 집이 건축되어서 남북 회담 및 교류 지원과 남북간 연락 업무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평화의 집은 군사회담을 제외한 남북간 민간회담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북측의 판문각은 북한 경비병 사무실 및 남북 회담 북측 대표 대기실로 사용되고, 8·15범민련 대회 등이 열리고 있다. 통일각은 남측의 평화의 집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1953년 포로 송환이 있었던 다리로서, 이 다리를 건너가면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동안 판문점에서는 1976년의 8·18 사건, 이 사건으로 미군이 벌인 폴 버니언 작전 등이 있었으며, 1990년대 들어와서는 북한군의 무장병력 진입 등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어왔다. 현재 판문점의 경비책임은 UN사령부가 맡고 있으나 한국군에게 이양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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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정전협정, 그 역사적 의의는?

 

 “한국전쟁”은 먼저 양측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초래하였다. 통계를 보면 남한측은 민간인 사망 37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38만 여명이며, 군인은 사망 13만 여명, 부상 45만 여명, 실종 2만 여명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합치면 약 160 여 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반면, 북한측은 민간인 사망 40만 여명, 부상 160만 여명, 실종 68 만 여명이며, 군인은 사망 52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9만 여명으로 합계 350 만 여명에 달한다. UN군은 사망 3만 여명, 부상 11만 여명, 실종 6천 여명이며, 중국군은 사망 11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3만 여명이었다. 위의 수치상으로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가 약 3천만명이라고 할 때 약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함께,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남한의 경우 일반공업시설의 40%, 주택의 16%가 파괴되었고, 북한의 경우는 피해가 이보다 더 심해서 전력의 74%, 연료 공업의 89%, 야금업의 90%,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은 양 측에서 600만 명이 넘는 인명피해를 입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하여금 남북한에 공고한 분단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양 측에게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와 반미이데올로기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증오와 대립을 심화시켰다. 전쟁을 통해서 분단선을 제거하려던 애초의 목표는 사라졌고, 오로지 서로에 대한 증오와 공고한 분단체제만을 가져다 주었다.

6.25 한국전쟁과 그 정전협정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 전선에서 침공을 감행한 인민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9일에는 대전을 점령한데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였다. 전쟁 개시 두 달 여만에 남한 전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6월 27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고, 7월 8일에는 대구, 8월 18일에는 부산을 임시수도를 정하는 등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과정은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첫 단계는 인민군의 공세기로서 전쟁 개시에서 9월 15일까지의 상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인민군이 진출했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UN군의 전면적인 공세 단계로서 9월 15일에서 11월 초까지의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금 중부 지방에서 교착되는 인민군과 중국군의 합동공세 단계로서 1950년 11월 초에서 1951년 1월까지의 단계, 네 번째 단계는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이 모색되는 단계로서 1951년 2월에서 5월까지의 시기, 마지막으로 휴전협상과 소모전의 단계로서 1951년 5월에서 정전까지의 단계이다.

  북한의 한국전쟁 개시는 즉각적인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가져왔다. 전쟁개시 직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해·공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UN군을 조직하였다. 7월 1일에는 UN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압록강 근처에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금 중부전선에서 교착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어느 한편의 승리로 귀결되기에는 어려워졌다. 이에 소련 UN 대표 말리크는 전쟁 당사국에게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UN군 최고사령관의 휴전 제의와 김일성·팽덕회의 동의로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되었다. 양측은 2년이 넘는 휴전 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전쟁을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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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정전협정, 그 배경은?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정전’은 휴전의 전제로서 짧은 기간의 적대 행위 중단을 의미한다. 반면 ‘휴전’은 전쟁의 중단을 의미하지만 전쟁원인의 해결에 합의하지 않은 채 전쟁을 종료한다는 점에서 「평화조약」과는 구분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휴전협정」이 전투행위의 일시적 중단뿐만 아니라 전쟁의 재발방지 조치 마련 및 궁극적 포기까지 내포한 개념이 되었다. 현재 북한은 휴전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정전이라는 용어만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대체로 평화체제가 완전히 구축된 '전쟁의 종식'과의 차이만 구별된 채 휴전 혹은 정전이라는 개념이 중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UN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중국은 한국전쟁의 참전을 결정하였고, 이로 인해 한국전쟁의 성격은 완전히 변모되었다. 즉, 관련당사국간의 전쟁에서 이데올로기간의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또한 중국군의 참전과 전선의 교착 상태가 지속되면서 어느 한쪽이 군사적으로 완전히 승리할 가능성은 요원해졌다. 실제로 1951년 초 전선은 다시금 38선 부근으로 고착되었고, 상대방 진영을 돌파하기 위한 작전보다는 진지방어전에 주력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군 사령관이었던 팽덕회도 “한국전쟁에서 신속한 승리가(速勝) 불가능하다”라고 인식했고, 맥아더 역시 중공군 개입이후 UN군은 전혀 ‘새로운 전쟁’과 마주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였다. 당시 미국은 맥아더의 중국 본토까지를 포함하는 ‘확전’ 주장과 트루먼을 중심으로 한 ‘휴전’ 파간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미국에서의 ‘확전’과 ‘휴전’ 논쟁은 맥아더의 해임을 가져왔고, 맥아더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 사령관은 북진에 대한 제한을 명령하면서 제한적인 전쟁만을 지시하였다. 양측의 군사적 승리에 대한 불확신, 미국 내부에서의 전쟁에 대한 전략 수정, 소련의 긴장 완화에 대한 요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전이 제의되었고, 2년여의 지루한 공방 끝에 불안정한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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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은 무엇인가?


1. 한국측의 양보와 배려로 설정된 NLL

  1953년에 「정전협정」 체결시 UN군과 북한측은 쌍방간의 견해 차이로 인하여 지상에서의 군사분계선(MDL)과 같이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해상경계선에 대한 합의에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1953년 8월 30일 UN군사령관(Mark W. Clark 대장)은 한반도 해역에서 남·북간의 우발적 무력충돌 발생 가능성을 줄이고 예방한다는 목적으로 동해 및 서해에 우리 해군 및 공군의 초계활동을 한정하기 위한 선으로 북방한계선을 설정하였다. 서해 5도와 그 주변수역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우리의 관할권에 속해 있었고 함경도와 평안도의 바다까지 UN군이 점령하고 있었으나 우리의 양보와 배려가 있었다. 당시, 서해상에는 영해 기준 3해리를 고려하고 서해 5개도서(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와 북한지역의 개략적인 중간선을 기준으로, ‘북방한계선(NLL : Northern Limit Line)’을 설정하였다.
  그 이후 1996년 7월 1일 UN사/연합사의 정전시 교전규칙을 개정하면서 동·서해 모두 ‘북방한계선(NLL)’으로 명칭을 통일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NLL 설정 이후 북한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1973년 10월부터 11월까지 43회에 걸쳐 북방한계선을 의도적으로 침범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도 간헐적으로 NLL의 무실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1992년에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 및 불가침 부속합의서〉를 통하여 합의·체결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본합의서〉 제11조에서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고 명시하였고, 〈불가침 부속합의서〉 제10조에서도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 불가침구역은 해상 불가침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2. 정전협정과 남·북 기본합의서에서의 NLL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 당시 해상경계선에 대해서는 명확히 확정하지 못한 채 다음과 같은 조항들에 합의하고 상을 종결하였다. 즉, 「정전협정」 제2조 13항에서 “상대방지역의 후방과 연해도서 및 해면으로부터 모든 병력을 철수한다. 상대방지역의 연해도서란 현재 일방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1950년 6월 24일 당시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도서를 말한다. 단, 황해도~경기도 도계선 북서쪽 도서 중 백령도 등 5개 도서는 남측 통제하에, 나머지는 북측 통제하에 둔다”고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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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 전쟁의 의의는 무엇인가?



 “한국전쟁”은 먼저 양측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초래하였다. 통계를 보면 남한측은 민간인 사망 37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38만 여명이며, 군인은 사망 13만 여명, 부상 45만 여명, 실종 2만 여명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합치면 약 160 여 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반면, 북한측은 민간인 사망 40만 여명, 부상 160만 여명, 실종 68 만 여명이며, 군인은 사망 52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9만 여명으로 합계 350 만 여명에 달한다. UN군은 사망 3만 여명, 부상 11만 여명, 실종 6천 여명이며, 중국군은 사망 11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3만 여명이었다. 위의 수치상으로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가 약 3천만명이라고 할 때 약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함께,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남한의 경우 일반공업시설의 40%, 주택의 16%가 파괴되었고, 북한의 경우는 피해가 이보다 더 심해서 전력의 74%, 연료 공업의 89%, 야금업의 90%,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은 양 측에서 600만 명이 넘는 인명피해를 입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하여금 남북한에 공고한 분단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양 측에게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와 반미이데올로기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증오와 대립을 심화시켰다. 전쟁을 통해서 분단선을 제거하려던 애초의 목표는 사라졌고, 오로지 서로에 대한 증오와 공고한 분단체제만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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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 전선에서 침공을 감행한 인민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9일에는 대전을 점령한데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였다. 전쟁 개시 두 달 여만에 남한 전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6월 27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고, 7월 8일에는 대구, 8월 18일에는 부산을 임시수도를 정하는 등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과정은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첫 단계는 인민군의 공세기로서 전쟁 개시에서 9월 15일까지의 상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인민군이 진출했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UN군의 전면적인 공세 단계로서 9월 15일에서 11월 초까지의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금 중부 지방에서 교착되는 인민군과 중국군의 합동공세 단계로서 1950년 11월 초에서 1951년 1월까지의 단계, 네 번째 단계는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이 모색되는 단계로서 1951년 2월에서 5월까지의 시기, 마지막으로 휴전협상과 소모전의 단계로서 1951년 5월에서 정전까지의 단계이다.

  북한의 한국전쟁 개시는 즉각적인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가져왔다. 전쟁개시 직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해·공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UN군을 조직하였다. 7월 1일에는 UN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압록강 근처에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금 중부전선에서 교착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어느 한편의 승리로 귀결되기에는 어려워졌다. 이에 소련 UN 대표 말리크는 전쟁 당사국에게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UN군 최고사령관의 휴전 제의와 김일성·팽덕회의 동의로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되었다. 양측은 2년이 넘는 휴전 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전쟁을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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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 전쟁의 발생 배경은?

 

 “한국전쟁”이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을 말한다. ‘6·25 사변’ 또는 ‘6·25동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韓國戰爭 Korean War: 일부에서는 Korean Civil War라고 주장하기도 함)”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행위가 계속되었다.


  한반도에서의 분단정부의 수립은 김구의 예언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을 잉태한 것이었다. 분단정부 수립에서부터 이미 한반도는 내전적 상황에 처해 있었고, 1948년 2월 7일의 남로당주도의 이른바 2.7 구국투쟁에서부터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의 발발까지 무려 10만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38선에서도 연대급 이상의 병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남한의 이승만은 무력증강과 전쟁에 대비한 준비도 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하였고, 북한의 김일성도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 회의〉 석상에서 ‘국토완정(國土完整)’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였다. 이에 김일성은 1949년 3월의 모스크바 방문과 1950년 3월의 비밀 방문 등을 통해 전쟁준비를 진행하였으며, 공산화된 중국과도 긴밀히 협의하였다. 김일성은 1950년 모택동과  비밀회담을 갖고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중국은 공산화 이후 공산혁명을 위해 참전했던 조선족 부대 약 2만 여명을 북한으로 보내주었다.

  이처럼 전쟁을 위한 무력증강에 힘쓰던 북한은 드디어 1950년 3월에 스탈린의 최종 승인과 5월에 모택동의 동의를 통해 전쟁을 개시할 결정적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전쟁의 개시 이전인 1950년 1월에 발표된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의 ‘한국은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요지의 발언은 북한의 도발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북한의 김일성과·스탈린·모택동은 중국 혁명의 성공, 애치슨 선언, 그리고 남한에서의 사태 전개(유격대 투쟁과 남조선 인민 봉기의 예상)등으로 전쟁의 조건이 성숙하게 되자 1950년 6월에 전쟁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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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6일 금요일

MBC, 뉴스데스크에 이어 라디오의 클로징멘트도 화제!

 

 MBC 뉴스데스크에 이어 오늘 MBC 라디오 아침 8시 뉴스의 클로징멘트가 화제다.
MBC라디오 아침 8시 뉴스의 김상수 앵커는 26일 클로징멘트를 통해 다시 돌아온 '대한늬우스'에 대해 일침을 날렸다.

"정부가 '대한늬우스'를 부활시켜서 극장에서 '4대강 사업'을 홍보한다니깐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화보러 가지 말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고 하지요."

 "문화체육관광부가 영화산업을 적극 지원하고, 잘되게 하려고 있는 부서인데요...
이렇게되면 극장수입이 줄꺼고, 영화산업에도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을겁니다."

 "공연한 평지풍파를 일으킨 정책은 스스로 폐지하는게 제일 좋은 해결책 아니겠습니까"

 "오늘 순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뉴스데스크뿐만 아니라 라디오에서까지 촌철살인 클로징멘트를 들을 수 있게 되면서 MBC는 네티즌들의 뜨거운 응원을 한몸에 받고 있다. 언론에대한 불신 풍조가 확산되는 현 시점에서 MBC가 국민들의 희망이 되어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독재정권의 선전 수단이라는 비판과 대중매체의 급속한 보급에 따라 1994년 제작이 중단됐다가 15년만에 부활한 '대한늬우스'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유로  각계각층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의 클로징멘트 또 다시 화제


  MBC 뉴스데스크의 촌철살인 클로징멘트가 또 다시 화제다.
MBC 뉴스데스크는 지난 25일 무료급식 예산을 삭감한 경기도 교육위원회와, 최저임금 인하를 주장하는 경영자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아래는 화제가 된 클로징멘트 전문이다.

 "경기도 교육위원회는 형편이 넉넉지 못한 아이들의 밥값 예산을 반으로 줄였고, 경영자 측은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최저임금을 깎자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그늘진 곳에서 깎아 낸 돈으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려는 진 잘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의 팍팍함에 한숨이 나오는 밤입니다."  

 "6월 25일 뉴스데스크를 마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정부와 여당의 언론장악이 우려되는 현 시점에서 MBC가 국민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경기도 교육위원회는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무료급식에 대한 예산을 삭감해 네티즌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2009년 6월 25일 목요일

15년만에 부활한 '대한늬우스', 비난 여론 확산


 15년 만에 부활한 '대한 늬우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뜨겁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정부는 '4대강 살리기'를 주제로 제작한 영상을 25일부터 전국 52개 극장의 190개 상영관을 통해 선보인다고 한다.  이번에 상영되는 대한늬우스는 '4대강 사업'에 대해 대화하는 1분 30초 분량의 코미디 정책홍보 영상으로 '가족 여행'과 '목욕물' 등 2편으로 제작됐다.

 이에 대해 각계각층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민주당은 논평에서 반문화적 행태를 중단하라며 '대한 늬우스'의 중단을 촉구했고, 민주언론시민연합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요구한다'라는 제하의 성명을 통해 '대한 늬우스'를 독재정권의 망령으로 규정지으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네티즌들의 비난과 반발도 거세다. 다음 아고라 청원게시판에는 대한 늬우스 부활 철회를 목표로 서명운동이 진행중에 있고, 토론사이트 티워에서도 '대한 늬우스'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한편 '대한 늬우스'는 1953년부터 주간 단위로 정부 정책 등을 알리기 위해 극장에서 상영한 정책 홍보 영상물로 독재정권의 선전 수단이라는 비판과 대중매체의 급속한 보급에 따라 1994년 제작이 중단됐었다.


대한늬우스에 대한 기록들을 원하시면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세요!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노무현 티셔츠 입고 방송하는 프랑스 앵커 화제



 프랑스의 한 방송인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나와 방송하는 동영상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다.

 유튜브에 올라온 이 동영상은 총 1분 41초 분량으로 진행자가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과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노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몽테네아두르로 프랑스 FBC 방송국의 앤텐바로부라는 프로그램의 앵커이다. 몽테네아두르로는 평소 한국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의 역사-60년대부터 오늘까지



 새마을운동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함축하고 있듯이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을 희망하던 국민의 요구와 ‘조국근대화’를 추진하던 국가의 의지가 결합된 ‘잘 살기 위한 운동’이었다.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해방과 분단, 전쟁과 페허, 4·19와 5·16 등과 같은 한국현대사의 유산들이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산물이었다.

 새마을운동의 태동배경은 첫째, 1960년 5·16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체제는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얻고 국가통치의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반공주의와 발전주의에 기초한 ‘조국근대화’ 전략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둘째,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수행으로 연평균 9%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지만 경제발전을 향한 국가와 사회의 열망은 여전하였다. 셋째,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탈농현상’과 도시빈민문제 등 다양한 사회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사회통합의 국가적 시도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새마을가꾸기사업’을 시작으로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지방장관회의를 통해서 ‘새마을가꾸기’를 처음으로 언급하면서 농촌부흥을 위한 국가정책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1971년 정부는 새마을가꾸기사업을 시행하여 전국 3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6포를 공급하고 마을 앞길 확장, 공동빨래터·공동우물 설치 등 마을공동사업을 중점적으로 실시하였다.
또한 정부는 사업성과가 우수한 마을 16,600개를 선정하여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추가로 지원함으로써 이후 마을의 등급화와 차등 지원이라는 새마을운동의 추진원리를 수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70년대 ‘사업’에서 ‘운동’으로
 
 

 농촌마을의 적극적인 참여와 기대하지 않은 성과로 인해 1972년 새마을가꾸기사업은 농촌환경개선을 위한 하나의 ‘사업’에서 전국민적 참여를 요구하는 ‘농촌새마을운동’으로 확장되어 시행되었다.
1974년부터는 산업현장의 생산성을 높이고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하여 ‘공장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다.
1976년에는 도시지역의 공동체의식을 높이고 새마을운동의 범국민화를 위하여 ‘도시새마을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로써 새마을운동은 짧은 기간 동안 지역과 세대를 넘어 급속도로 파급될 수 있었다.
 
 1980년대 시련과 침체의 시기
  
 1980년대 새마을운동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과 제5공화국의 출범을 맞이 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주도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새마을운동은 권위주의적 체제였던 제5공화국의 정권적 목표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관변운동’이라는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1988년 ‘5공 청문회’에서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새마을운동은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새마을운동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통하여 질서·친절·청결 등 3대 시민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기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90년대 사회공익활동을 통한 거듭나기
  
 1990년대 새마을운동은 국민의 무관심과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하기 위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사회공익활동을 강화하는 등 새로운 운동 방향을 모색하였다.
1991년 ‘새마을지도자 윤리 강령’ 제정, 1996년 지방 조직의 법인화, 정치적 중립 명문화,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경제살리기운동’ 전개 등을 통하여 새마을운동의 공공성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1998년 12월에는 ‘제2의 새마을운동’ 선언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 구현’이라는 새로운 이념적 지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대내외적인 재조명의 시기

 2000년 이후 새마을운동은 공공정책적 사업과 저개발국가 지원 사업을 통하여 대내외적으로 높은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민간안전망 사업, 지역활력화 및 농촌살리기 사업 등을 실행하여 공동체의식 함양과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하였으며, 국제사회에서는 북한·필리핀·몽골·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 등의 지역사회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대외적 위상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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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2일 월요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의 책상 비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의 집무실 책상을 비교한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고 있습니다.

 먼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상(사진 위)에는 펼쳐진 노트북과 책을 비롯해 각종 첨단 무기의 프라모델들이 보입니다. 주개발 본격 추진, 햇빛정책도 철저한 안보태세 확립 위에 가능한 것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반면 이명박의 책상 위에는 켤줄도 모르는 노트북만 덩그러니 있어 매우 깔끔한 인상을 줍니다.



  한편 티워 리서치 결과, 99%의 네티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상에 호감을 나타냈습니다.
 이명박 책상을 선택한 1%는 아마 대한민국 상위 1% 부자들인가 봅니다. 혹은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결벽증 환자일지도 모르겠네요.

알몸으로 진행하는 네이키드 뉴스, 여론은?


 네이키드 뉴스 한국지사 네이키드뉴스코리아(NNK)는 오는 23일 국내 런칭 행사를 갖고 본격적인 서비스를 실시한다고 합니다.

 런칭 행사에는 요아브 시나이 NNK 대표를 비롯, 데이비드 와가 네이키드 뉴스 글로벌 대표이사, 캐나다 인기 앵커 빅토리아 싱클레어, 캐서린 커티스 등 네이키드 뉴스 를 대표하는 관계자와 최근 선발된 네이키드 뉴스 국내 앵커들도 참석할 예정이어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앞서 네이키드 뉴스는 지난해 초에 한국어 뉴스를 위해 현지 협력업체와 계약을 통해 뉴스 진행자를 고용하겠다고 밝혀, 한국어를 구사하는 여성 진행자를 채용할 것임을 예고했었습니다. 업계에 따르면, 네이키드 뉴스는 국내 법규에 접촉되지 않는 선에서 서비스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끊이지 않는 선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티워 리서치 결과에 따르면 많은 네티즌들이 네이키드 뉴스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18세 소녀의 침(타액)을 팝니다


 최근 중국의 한 쇼핑몰 사이트에 ‘18세 소녀의 침(타액)’을 판다는 엽기 광고가 등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중국 최대 쇼핑몰 사이트인 ‘타오바오왕’에 등장한 이 광고에는 소녀의 사진과 함께 ‘18세 소녀의 침이 담긴 병 하나 당 20위안’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쇼핑몰에 침을 올린 저우(周)씨는 ‘예로부터 소녀의 침은 강장제로 여겼다. 소녀가 잠을 자는 사이에 몰래 채취한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 네티즌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그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품을 올리자마자 네티즌 수 만 명이 클릭했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상품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티워 논객들은 대체로 소녀의 침 판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내 마음 속 대통령 '노무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가 21일 오후 7시 30분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열렸습니다.

 탤런트 권해효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가수 신해철, 전인권, YB를 비롯해 천호선 전 홍보 수석, 명계남 전 노사모 대표, 안희정 민주당 최고의원, 이해찬 전 국무총리,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참석해 고인을 기렸습니다. 

 대한민국에 다시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9년 6월 20일 토요일

경찰, 고려대 총학생회장 기습 연행 시도

 경찰이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기습 연행하려다 학생과 시민들이 막아서면서 실패했습니다.

 CBS의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19일 저녁 서울 경희대학교 앞 도로에서 대학생 시국대회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던 고려대 총학생회장 정 모 씨를 연행하려다 이를 저지하는 학생, 시민들과 20여 분동안 몸싸움을 벌인 끝에 연행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총학생회 측은 경찰이 이미 지난 주 정 씨의 집에 두 차례에 걸쳐 들이닥쳐 체포와 압수수색 영장도 제시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수색을 했다고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정 씨도 학생회 홈페이지를 통해 "어떤 남자 3명이 타고있던 택시에 다짜고짜 들어와 여자 집행부 2명을 폭력적으로 끌어내리고 여 학우의 가슴을 만지는 일까지 벌였다"며 "신분증과 영장 제시를 요구했지만 보여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경찰은 정 씨에 대해 집시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지난 달 말부터 소환통보를 했지만 정 씨가 이에 불응하자 수배를 내려 연행하려 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 기사에 네티즌들은 지금이 "1979년이 아닌 2009년이 맞나", "조금 있으면 통금시간도 생기겠다"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역행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무섭기만 합니다.

모건 프리먼, 손녀와 성관계 파문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헐리웃의 명배우 모건 프리먼(72)의 결정적 이혼 사유가 의붓 손녀와의 성관계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LA타임즈 등 미국 언론들은 19일(한국시간) 모건이 미르나 콜레이-리와의 25년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게 된 이유가 바로 첫 번째 아내 자네트 아데어 브래드쇼의 의붓 손녀 에디나 하인즈(27)와 성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영국 타블로이드 매체 ‘디 인콰이어러’를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프리먼의 가까운 친척은 “하인즈가 10대 시절이던 어느날 프리먼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가 둘 다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와서는 프리먼의 유혹으로 성관계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고 털어놨다는데요.

  프리먼은 이에 대해 “이와 관련해서는 아무 말도 할 게 없다”는 입장을 이메일로 알려왔다고 이 신문은 전했습니다.


 한편 스포츠서울,파란닷컴 등과 함께 티워에서 모건 프리먼의 행동에 대한 토론이 진행중입니다.
대다수 네티즌들이 "그건 아니다"라고 응답한 가운데 "그럴수도 있다"라고 응답한 네티즌도 27%나 있었습니다.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100분 토론 중 "이명박 죽으면 떡 돌린다" 파문



 지난 18일 MBC 100분 토론에서 전화로 시청자 의견을 받던 도중, 한 시청자가
"이명박 대통령이 죽으면 떡 돌린다. 이게 바로 여론입니다"라고 말해 파문이 일고 있다.


 토론사이트 티워에서는 문제의 동영상에 대한 토론이 진행중이다.
현재 티워리서치 결과는 '나도 돌릴래'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99%이고, 단 1%만이 '지나치다'라고 답했다.

 어쩌면 정말 "이명박 대통령이 죽으면 떡 돌린다"가 여론이고, 민심일까?

 
  

안양교도소, 노무현 전 대통령 독방 준비 파문


 경인TV OBS의 보도에 따르면 안양교도소가 故 노무현前대통령의 구속 입감에 대비해서 특별팀을 구성하고,극비리에 독방을 만들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당초 알려진 검찰의 '노前 대통령 불구속 기소'방침과는 대치되는 것이어서 파문이 이고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안양교도소는 노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은지 보름 가량 지난 시점이자 서거 일주일 전 쯤이었던 5월 중순께 보안관리과 A모 교도관을 팀장으로 5~6명의 TF팀을 구성해 6평(20㎡) 정도의 새로운 독방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검찰의 '불구속 기소' 방침에도 불구하고 법무부에서 구속을 상정해 검찰에 지휘권을 행사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이 방송은 지적했다.  

 이 방송은 또 "시설이 없으니까 들어오게 되면 독거시설에 수용하는 거였고…", "서울에는  형도 있고, 같은 관계인이 많이 수감됐으니까 안양으로…"라는 교도소 관계자의 인터뷰 내용도 함께 공개했다.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자 법무부는 긴급히 공식 해명자료를 내고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놨다. 법무부는 "안양교도소에 사실관계를 확인한 바 특정사건(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해 TF팀을 구성하거나 독방 준비 등 수용에 대비한 사실이 없었다"며 "법무부에서도 노 전 대통령과 관련해 어떤 지시사항도 안양교도소에 시달한 바 없다"고 해명했다. 

  한편 이 내용은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논란은 쉽게 꺼지지 않을 전망이다.


나경원, 국민들은 무식해서 여론조사 안돼?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8일 "미디어법은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며 여론조사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국회 문방위 한나라당 간사인 나 의원은 이날 CBS 라디오에 출연해 "국민들이 미디어법 성격을 잘 알고 여론조사에 응할 수 있겠나, 모든 쟁점 법안에 대해 여론조사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티워리서치 결과에 따르면 대다수 누리꾼들이 나 의원의 발언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티워 논객 신님은 "국민들이 무식해서 죄송하다"며 비꼬았고, 부산龍湖男님은 "한마디로 국민들을 우습게 본다는 소리 아닌가?"라며 분개했다. 유체이탈님도 "당신들만 아는 법, 우리는 필요 없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F님은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은 국민들이 무식하다는 말과는 다르다"며 나 의원의 발언이 타당하다는 의견이었지만 큰 힘을 얻지 못했다.

 
한편 미디어법이 한나라당의 뜻대로 6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될지 귀추가 주목된다.